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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 대한항공(MD82)
비행기 / 대한항공(MD82)
교통
개념
공기의 작용에 의해 지상으로부터 높이 떠서 대기권을 비행하는 기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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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공기의 작용에 의해 지상으로부터 높이 떠서 대기권을 비행하는 기계.
내용

미사일은 비행기의 원리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비행기의 종류에서 제외된다. 비행기는 크게 공기보다 가벼운 경비행기(輕飛行機)와 공기보다 무거운 중비행기(重飛行機)로 분류된다. 경비행기는 수소나 헬륨같이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주머니에 넣어 정역학적부력(靜力學的浮力)을 이용하는 것으로서 기구와 비행선이 이에 속한다.

중비행기는 동역학적부력(動力學的浮力)을 이용한 것으로서 일반소형비행기·민간상용비행기·군용기·글라이더 등의 고정날개[固定翼] 비행기와 오토자이로·헬리콥터·실험연구비행기·보에이저 무착륙 무급유 세계일주비행기·초음속여객기·극초음속여객기 등의 회전날개[回轉翼]비행기가 있다.

기구는 자유기구와 끈으로 잡아맨 기구로 구별되는데, 최초의 기구비행실험은 1678년 6월 프랑스의 몽골피에(Montgolfier,J.) 형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같은 해 10월에는 로지에(Rozier,F.R.de)가 몽골피에의 대형기구를 타고 4분 동안 공중을 날게 되어 인류 최초의 비행에 성공하였다.

처음 기구가 창안되었을 때는 주머니에 뜨거운 공기를 넣었으나 1800년대에 헬륨과 같은 저온가스가 생산되자 이것을 더운 공기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기구가 군용으로 사용된 예는 1794년 벨기에에서의 플로이루스전쟁(Fleurus戰爭)과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끈으로 잡아맨 기구로 적의 정찰에 사용한 것이다.

기구는 지구사진관측과 기상관측에도 쓰였는데, 1933년부터 1935년 사이에 소련에서는 1만 9260m, 미국은 2만 2066m 상공까지 기구관측비행을 했다. 비행선은 양력을 발생하게 하는 날개가 없이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헬륨을 가스주머니에 저장해서 자체 중량을 공중에 지지하면서 비행한다.

자유기구와는 달리 비행선은 주유기구에 동력장치를 부착한 것으로서 조종사가 방향과 고도를 변경하면서 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장거리비행이 가능해졌다.

1900년 7월 독일의 체펠린(Zeppelin, F.)이 경식비행선(硬式飛行船)을 제작, 비행함으로써 제1차세계대전중에는 영국을 폭격할 수 있게 되었고, 당시의 비행기보다 항속거리와 탑재화물, 승객수에서 우수하여 비행선이 교통수단으로 크게 각광받았다.

1937년 5월 6일 독일의 비행선 힌덴부르크호(Hindenburg號)가 승객 50명과 20t이 넘는 화물을 싣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미국 뉴저지주 레이크허스트(Lakehurst)에 착륙하기 직전 수소가스가 폭발하여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때문에 대서양횡단 비행선운항이 중지되었다. 근래에 와서 다시 비행선이 실용화되어 운동중계·잠수함초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비행기는 날개에 발생하는 양력을 이용하여 비행하는데 날개가 동체에 고정되고 엔진이 있는 것이 일반적인 비행기이고, 고정날개에 엔진이 없는 것을 글라이더[滑空機]라 한다.

회전날개를 가진 중비행기 중 오토자이로는 점점 없어지고 근래에는 수직이착륙기(V·STOL)가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양쪽 성격을 겸비한 항공기로 등장하고 있다.

1891년 독일의 릴리엔탈(Lilienthal)은 공기보다 무거운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했고, 1903년 12월 17일 미국의 라이트(Wright) 형제가 인류 최초로 가솔린엔진을 장비한 복엽기(複葉機)로 12초 동안에 36m를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비행기의 중요한 부분으로는 양력을 발생하게 하는 앞날개와 기체의 균형을 잡아 주는 꼬리날개가 있다. 날개에 양력이 발생하는 원리는 공기가 날개의 주위를 지나가면 날개 상면의 압력은 불어오는 공기의 압력보다 낮고, 날개 하면은 압력이 높기 때문에 날개 전체를 밀어올리는 힘이 생긴다.

비행기는 이와 같은 양력에 의해 하늘을 날게 되는 것이다. 1947년 10월 14일 미국의 공군소령 예거 (Yeager)는 벨·X―1이라는 로켓엔진을 장비한 비행기를 B―26 폭격기의 동체 밑에 부착해서 높은 고도를 비행하다가 분리하여 로켓 추진으로 라이트 형제 이후 44년 만에 음속돌파비행에 성공했다.

1960년대에는 이미 음속의 3배를 넘는 초음속정찰기(SR―71)까지 등장하여 인간의 우주비행에 필요한 기술발전을 보였으며, 1969년 7월 20일에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과 지구로의 귀환 성공으로 라이트 형제 이후 66년 만에 항공우주시대의 도전을 성공시켰다. 1981년 5월의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의 발사성공은 인간의 우주비행과 여행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나무꾼과 선녀에 관한 이야기나 심산유곡에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선조에게도 하늘을 날아가는 꿈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음을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실제로 비행했다는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나는데, 한 관리인이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어 비상함으로써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정평구(鄭平九)는 하늘을 나는 연(鳶)모양의 비거(飛車)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현대적 의미에서 국내에서 실시된 최초의 비행은 1913년의 일로 용산 연병장에서 일본 해군소속 중위 나라하라(奈良原三次)에 의한 것이었으나 겨우 떴다가 내리는 정도의 비행성능에 지나지 못했다. 이후 1914년 8월 18일에는 일본 민간인 다카소(高左右陸之)가 미국 커티스(Curtiss)복엽기로 용산에서 남대문까지 비행하여 서울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1916년 10월 초에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의 박람회에서 일본인 오사키(尾崎行輝)가 유료비행을 하였고, 1917년 5월에는 미국인 스미스(Smith)가 여의도 비행장에서 곡예비행대회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외국인들의 비행은 우리 국민들에게 비행기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을 고조시켰고 그 결과 안창남(安昌男)이 1921년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오쿠리비행학교(小栗飛行學校)에 입학하여 1921년 5월에 한국인 최초로 비행면허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1922년 11월에 일본비행협회에서 개최한 비행대회에서 1등을 하여 한국인의 우수성을 과시하였고, 이어 1922년 12월 10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모국방문비행을 실시하여 우리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워 주었다. 당시의 비행기는 일본에서 분해되어 배로 인천까지 운반하고 기차편으로 운반해서 다시 조립했다.

비행기 이름은 금강호(金剛號)였는데, 1인승 단발 복엽기이고 엔진은 80마력짜리로 영국에서 제작한 뉴포트(Nieuport) 15형으로 영국 육군용 비행기였다. 안창남의 모국방문 후에 1930년까지 일본에서 비행사자격을 획득한 사람은 이상태(李商泰)·신용욱(愼鏞頊)·이기인(李基寅)·서웅성(徐雄成) 등 15명 정도였다.

이기인은 1923년 12월 19일 안창남에 이어 두 번째로 모국방문비행을 했다. 1925년 6월 12일에는 장덕창(張德昌)이 모국방문비행을 했고, 1927년 12월 14일 신용욱은 자가용비행기로 인천 상공을 일주비행하고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1920년대 초부터 우리 나라 비행사들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각 군벌(軍閥)들이 다투어 비행사를 양성하여 광둥비행학교(廣東飛行學校)에는 한국인 박태하(朴泰河)·김진일(金震一)이 있었고, 남원비행학교(南苑飛行學校)에서는 서왈보(徐曰甫)가 졸업하여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안창남도 192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의 육군 중장으로 승진하여 항공사령관과 비행학교 교장으로 활약하다가, 1930년 4월 8일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상공에서 비행기추락으로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權基玉)과 이영무(李英茂)·장지일(張志日) 등은 윈난비행학교(雲南飛行學校)를 졸업하였고,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최용덕(崔用德)과 김은제(金殷濟)는 바오딩비행학교(保定飛行學校)를 졸업하여 비행사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한편, 일본서 활약하던 비행사로는 제4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장덕창과 한국 최초의 민간항공회사인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설립한 신용욱을 비롯하여 이상태·정재섭(鄭再燮)·민성기(閔成基)·김치간(金治玕)·권태용(權泰用)·서웅성·이정희(李貞喜) 등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본군의 항공정책에 따라 각지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대륙침략의 야욕으로 중국 다롄(大連)까지의 장거리 항공수송의 중간기착지 구실을 하게 했다. 일본 사람들의 독점으로 빼앗긴 민간항공사업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참여하기는 힘들었으나, 이기인은 경성항공사업사(京城航空事業社)를 1926년에 설립하는 등 경영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행사고로 1927년 9월 10일에 사망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최초의 항공사업은 무산되었다. 1930년 5월에 신용욱은 조선비행학교(朝鮮飛行學校)를 설립하고, 1935년 9월에는 중국 대륙의 북경(北京)·난징(南京)까지 친선비행을 했다.

그는 1936년 10월에 조선항공사업사(朝鮮航空事業社)를 설립하여 서울∼이리, 서울∼광주간의 정기노선운행을 하였고, 1944년 2월에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朝鮮航空工業株式會社)를 일본 해군과 합자하여 부산에 설립, 우리 나라 최초로 비행기를 생산하게 되었으나 광복과 더불어 문을 닫았다.

1944년 12월에 박흥식(朴興植)은 일본 육군의 도움으로 안양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시작기(試作機) 1대 만을 만들었을 뿐, 이것도 광복을 맞아 폐쇄되고 미군정하의 항공사업 중지정책 때문에 독립국가로서의 항공공업 발전의 기틀마저 세울 수 없게 되어 당시의 첨단기술의 계속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선진공업국가로서의 꿈도 사라졌다.

광복 이후 한국 공군은 항공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1949년 9월 미군으로부터 10대의 L―4연락기를 인수함으로써 한국 정부가 보유한 최초의 군용항공기가 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공군은 7월 2일 미공군으로부터 F―51 전투기 10대를 인수하였는데, 이 전투기는 한국 공군이 보유한 최초의 전투기로 6·25전쟁중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1957년 6월에 퇴역하였다. 휴전 이후 한국 공군은 1954년 3월에 폐기항공기 부품을 활용하여 부활호(復活號)라는 경비행기를 제작했으나 실용화되지는 못하였다.

1955년 6월 이후 1970년대까지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군용기로는 F―86F전투기·F―33제트연습기·C―46수송기·F―86D전투기·F―5A초음속제트기·F―4D팬텀전투기·C―54대형수송기·F―5E전투기·F―4E전투기·D―2A항공기·EC―47항공기·C―123항공기 등이 있다.

1980년 이후에는 자주국방 정책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도 비행기의 자체생산이 가능해져서 1982년 2월 국산전투기 제공호 F―5F를 생산하였고, 1986년에는 최신예 국내선에 취항시켰다.

한편, 광복 이후의 민간항공으로서 1962년 12월에 설립된 대한항공사는 1964년 1월에 44인승 F―27쌍발기 2대를 도입하여 한일노선과 국내노선에 취항시켰고, 1967년에는 더글러스회사제 DC―9제트여객기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국제선에 취항시킴으로써 민간항공의 제트여객기시대를 맞게 되었다.

1969년 3월 1일에 민영화된 대한항공은 비행기현대화 계획을 추진하여 1969년 9월부터 1973년 5월까지 보잉707제트여객기·보잉727여객기·DC―8여객기·YS―11여객기·보잉747점보제트기 등을 도입하여 미주노선과 한일노선에 취항시킴으로써, 민간항공이 발족된 지 24년 만에 태극 표시의 점보제트여객기가 미국 상공을 비행하게 되었다.

1979년에 점보제트기 7대를 비롯하여 기타 항공기 33대를 보유한 대한항공은 세계 15개 국 24개 도시를 누비는 국제적인 민간항공회사로 발전하였다. 한편, 제2민항인 아시아나항공사가 1988년 3월에 설립되어 12월부터 국내선에 취항하고, 1989년부터 국제선에 취항하고 있어 우리 나라도 본격적인 항공시대를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1922.12.10.)
『공군사』 1(공군본부, 2011)
『민항비화』(신아일보사, 1979)
『대한항공10년사』(대한항공,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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