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경제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자금융통이 공신력을 가지는 공적 금융기관에 의하여 매개되는 것이 보통이나, 신용경제가 발달하지 못하였거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곳에서는 사금융이 융성하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전승되어 온 각종 제도적 유산이나 관행, 또는 광복 이후의 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구조의 파행성으로 인하여 각종 사금융이 성행하고 있다.
근대적 금융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의 금융업에는 진정한 의미의 공적인 금융기관이 없었다. 다만 재래식 금융기관으로서 각종 형태의 대금업(貸金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경제가 근대화되어 감에 따라, 이들 중 어떤 것은 새로운 금융제도 속에 흡수되는가 하면, 어떤 것은 금융제도권 밖에서 사금융의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요컨대, 근대적인 자본주의 이전시대에 있어서 금융기관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개인적인 화폐축적자에 의한 고리대(高利貸)였다. 그 가운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객주(客主) · 시변(時邊) · 계(契) 등이며, 그 밖에 사인이 아닌 공공기관에 의하여 행해졌던 환곡을 들 수 있다.
첫째, 객주는 대체로 고려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와 유사한 것으로 여각(旅閣)도 있었다. 객주는 화물이 모여드는 도읍에 자리잡고 화물매매에 관련되는 모든 업무, 즉 도매업 · 창고업 · 위탁판매업 · 운송업 · 숙박업 등을 맡아보면서 금융업무도 수행했다.
그들이 맡아본 주된 금융업무는 화주(貨主)가 화물을 운반해 왔지만 판로가 발견되지 않거나 혹은 시세가 맞지 않아 거래를 할 수 없을 경우 화물을 담보로 화주에게 자금을 융통해주었다.
또한 자기를 통하여 화물을 판매하는 화주나 상인에게 그 매입자금을 대여하거나 또는 고객으로부터 위탁된 화물을 자기가 매각한 경우에 고객이 그 자금을 필요로 할 때까지 이것을 낮은 이자로 예수(豫受:미리 받아 둠)하는 것 등이었다.
그 밖에 왕실 · 양반계급 또는 중국상인으로부터 유휴자본을 미리 받아두거나, 스스로 신용화폐인 어음을 발행하고 또 인수하는 일도 하였다.
둘째, 시변은 개성상인들 사이에 행하여진 대금업으로서, 한편의 유휴자본 소유자와 다른 한편의 자금 수요자 사이에 ‘환전거간(換錢居間)’이 개재하여 무담보로 자금의 대차(貸借)를 이루는 것이다. 그 특징은 낙변(落邊)이라는 금리계산법에 의하여 단기유자의 대부운용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낙변은 이율이 월리(月利)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월 중도에 대차계약이 이루어지는 경우 4일 또는 5일마다 이율을 2리5모(二利五毛)씩 저하시켜 26일 이후에는 그 달의 이자를 붙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제도로서 개성상인들 사이의 협동정신과 신용을 중시하는 상업도덕을 배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셋째, 계는 일정한 사회적 · 경제적 목적을 위하여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 또는 서로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일정한 액수의 화폐나 곡물 또는 피륙 등을 갹출하여 공동기금을 모으고 또한 이것을 운영, 증식하여 서로 이용하기도 하고 또 나누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상호간의 신용을 토대로 저축 및 자금융통을 위하여 독창적으로 발전된 제도이기는 하나, 좁은 범위의 상호신용에 그칠 뿐 전근대적인 금융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익사회 · 조직적인 보(寶)의 성격을 띠면서, 민간의 자본이식 수단으로 널리 보편화되었다.
끝으로, 환곡은 정부가 절량농가를 구제하기 위하여 춘궁기에 관리양곡을 대여하였다가 추수기에 상환받는 일종의 진휼제도이다. 이 제도는 본래 빈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고구려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빈민구제는 커녕 오히려 관(官)의 고리대로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억배(抑配:强制配當)나 대징(代徵) 등 수많은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뒤에는 환곡을 담당하던 사창제가 문란해짐으로써 숙종시대에 이르러서는 백급백징(白給白徵:관청에서 양곡을 꾸지도 않고 조세를 물 만한 땅이나 납세의무가 없는 사람에게 까닭 없는 세를 물리거나, 아무 관계 없는 사람에게 세를 물리는 일)이 행해지는 등 관리의 부패로 말미암아 환곡의 폐해가 극심하였다. 이처럼 환곡이 고리대로 변질되자, 이 때부터 환곡폐지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의 금융의 가장 중요한 특징 하나는 금융의 이중구조로, 이러한 이중적 금융구조는 1910∼1945년의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최근까지 지속 되어 온 경제의 이중구조, 즉 근대적 산업 및 상업 부문과 전통적 농촌수공업 부문의 공존에서 비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조금융이 빠른 성장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당시의 금융제도는 근대적 산업부문의 금융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전통적 부문에 있어서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또한 이 제도는 전통적 부문의 저축을 금융화하거나 중개하는 데 주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적 부문에 있어서 금융적 요구는 토착적인 사금융이 담당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배에 대한 국민적 적대심은 근대적 금융제도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군비조달을 위하여 인플레이션 및 공채강매방식이 자행되었던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더욱 심화 되었다. 그 결과, 당시 사금융이 국민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막대하였다.
광복 후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기는 하였으나 이중적 금융구조는 지속되었다. 사금융 부문은 정부의 억제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 확대되었으며, 근대적 부문과 전통적 부문의 금융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그 영역을 확대해 왔다.
특히, 제도금융 부문에서 원활한 자금지 원이 따르지 못하는 단기유통금융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경제의 급속한 성장 및 근대화과정 속에서 사금융이 번성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강점기 말기의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싹튼 화폐 및 신용제도에 대한 불신, 6·25전쟁과 1960년의 4·19혁명, 1961년의 5·16군사정변 등에 따른 연속적인 경제적 붕괴와 사회적 무질서, 정치적 혼란, 그리고 1962년의 은행예금을 동결시킨 화폐개혁 등과 같은 충격적인 경제조처들은 제도금융에 대한 신뢰를 크게 저해시킴으로써 사금융의 성장을 촉진하는 주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둘째, 국내자본의 빈약과 낮은 국민저축 수준의 여건하에서 추진된 성장 위주의 경제개발은 만성적인 자금초과수요를 발생시켰다.
자금수요는 계속 증대되는 데 반하여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제도금융 부문에서의 지원자금이 부족할 뿐 아니라, 금융자금의 동결과 공급방식의 왜곡화 및 유동성 규제 등으로 자금공급이 부족함에 따라, 사금융의 수요가 증대되었다.
셋째, 높은 인플레이션하에서 시장원리에 입각하지 않은 경직된 저금리정책과 더불어 단기여유자금 운용을 위한 적절한 금융수단이 개발되지 못한 점도 사금융 번성의 한 요인이 되었다.
즉, 이로 인한 제도금융의 중개유인력이 약 화되어 저축자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채무불이행 위험과 정부의 단속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자가 싼 공금융보다는 단기 고수익의 사금융을 이용하는 경향이 많고, 따라서 제도금융기관은 유휴자금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여 자금수요에 대한 공급을 충족시키지 못하 였는데, 이러한 악순환은 사금융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였다.
넷째, 제도금융기관의 채권확보와 위험회피만을 중시한 물적 담보 위주의 대출과 근대적 산업부문에 대한 편향대출은 상대적으로 물적 담보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 · 농민 · 소비자 등의 자금수요자에게 사금융이 불가피한 자금조달원이 되도록 하였다.
다섯째, 제도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조달보다는 사금융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이 더 쉽고, 자금조달에 소요되는 시간도 짧기 때문에 실효비용을 따져볼 때 사금융이 공금융보다 결코 높은 편은 아니다.
여섯째, 자금을 차입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자금조달의 용이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사금융 공여자의 익명성을 보장해 주었다는 점도 사금융시장의 성장을 촉진시킨 요인이 되었다.
(1)사금융의 조직 및 메카니즘
사금융은 [그림]과 같이 세 개의 구성분자, 즉 사채자금의 공급자, 사채의 수요자 및 수요공급의 매개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공급자 측면을 보면 사채자금은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거액자금 으로서 대부분이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축적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액자금으로서 주로 가계저축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다.
처음 것은 전문사채업자를 통해서 대기업으로 가는 데, 이 과정은 고도로 전문화 · 조직화 · 효율화되어 있다. 신용을 근거로 하는 어음할인 형식으로 금융거래가 이루어지며, 이자율도 기업의 신용도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합리적인 금리체계를 갖추고 있다.
또한 그때 그때 경제상황에 의한 공금리의 등락에 따라 사채금리도 상당한 영향을 받으면서 등락한다. 1980년대 중반의 사채금리 동향을 보면, A급 어음은 월 2.2∼2.3%, B급 어음은 월 2.4∼2.5%, 그리고 C급 어음은 월 2.7∼2.8%로 거래되고 있다.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경제체제로의 전환 직후에는 한때 시중 자금경색 현상이 심화되어 B급 이하 어음할인율은 형성되지도 못하고 A급 어음할인율은 연이율 50%를 상회하기도 하였으나 1998년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이율 인하정책의 영향으로 사채시장의 어음할인율은 점차 1980년대 중반의 할인율을 각각 하회하는 수준을 보이고 있다.
한편 소액자금은 개인사채업자 또는 친지를 통하여 중소기업 및 영세상공인에게로 공급된다. 이 경우 금융거래는 기업의 신용 또는 부동산담보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며 시장은 조직화되어 있지 못하고 거래규모가 소액이라는 점에서 앞의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위험부담에 있어서도 양자는 서로 다르다. 거액자금은 이른바 ‘큰손’으로서 기업의 거래은행, 주요 정부기관, 정치권력 등을 통하여 기업에 대한 신용을 평가하고 때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채권은 기업에서 다른 어떤 채권보다 높은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거액자금은 거의 위험부담이 없는 사채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소액자금은 위험부담이 많은 사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래대상이 중소기업 또는 영세상공인이기 때문에 채무자의 신용도도 낮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상당한 정도의 채무불이행을 감수하여야 한다.
(2) 규모와 현황
한편, 사채자금의 공여형태를 조건별로 보면, 주로 차입자의 연수표(延手票) · 약속어음 및 유가증권 등의 담보를 토대로 행해지고 있으나, 상당 부분이 무담보로 행해지기도 한다.
사금융 시장은 1992년 이후 경기 둔화로 금리가 하향 안정화되고 사채자금 수요도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으나 1995년 이후에는 전형적인 사채업무인 어음 할인 이외에도 자동차 담보대출, 골프회원권 담보대출, 가계수표 할인, 상품권대출 등 신종 사채놀이가 더욱 다양하게 개발되고 편법으로 운영되는 등 기능면에서 사금융 시장은 신종상품을 사용해 더욱 다양화되고 시장구조도 전문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공여형태를 갖는 사채규모는 1977년 국제통화기금보고서와 ‘8·3긴급경제조치’ 사채보고자료 및 시중사채업자의 추정치를 평균하여 볼 때, 1981년 말 약 1조 1000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는 은행대출의 7%, 통화량의 27%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채규모는 한국금융연구원과 한국갤럽이 조사한 1994년 기준으로 보면 중소기업 18조 4396억 원, 자영업자를 포함한 일반인의 사채 이용규모는 15조 4104억 원으로 총 33조 85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994년 총경상GNP 302조 8670억 원의 11.2%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수치는 플로단계(floo)적 개념의 자금 규모로서 이를 각각 사채상품의 연간 회전율로 나누어 산출한 평균잔액은 8조 3900억 원이며 동년 총통화량의 7.1% 정도이다.
이 비율들이 ‘8·3긴급경제조치’ 당시인 1972년에는 각각 29%와 67%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동안 우리 나라 금융에 있어서 사채의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주된 요인은 ‘8·3긴급경제조치’와 더불어 급속히 성장한 단기금융기관이 사채를 대량으로 흡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금융은 표면화되지 않고 음성적으로 성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 규모를 정확히 산출할 수는 없다. 다만 몇 가지 추정방법을 통하여 그 분포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금융은 이용 주체에 따라 기업금융과 가계금융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업금융에 있어서 사금융은 기업의 단기운용자금에 충당되며 가계금융에 있어서는 서민금고 및 계 등을 통하여 가계자금으로 충당된다.
각각의 사금융 이용 실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기업금융의 경우, ≪전경련 제21회기업금융실태조사≫에 의하면, 사채를 사용하는 기업체 수는 전체의 26%로서 적은 편이지만, 사채사용업체의 사채의존도는 기업 전체 또는 경제 전체의 평균치보다 훨씬 크게 나타나고 있다.
1981년 말 전체 기업의 차입금 중 사채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7.4% 정도인 데 반해, 사채사용업체의 경우는 20.8%에 이르고 있다. 사금융의 은닉성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수치들은 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며, 실제로 민간 중소기업에 있어서의 사채의 비중과 중요도는 숫자가 말해주는 것보다 훨씬 크다.
사채는 대부분 기업의 운전자금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경기 상승기에는 사채차입의 10% 내외가 설비투자에 쓰인다. 특히, 중소기업은 사채의 13% 정도를 설비투자에 사용하고 있다.
산업별로 보면 건설업의 사채의존도가 제조업보다 약간 높다. 사채의 타인자본에 대한 비율을 보면, 1981년 하반기에 건설업은 4.3%, 제조업은 3.6%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건설업이 담보능력에 있어 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음으로써 은행대출이 어렵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사채차용에 있어 담보이용을 보더라도 건설업은 무담보가 70%를 차지하는 데 반해, 제조업에서는 33.6%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규모별로는 중소기업이, 업종별로는 건설업이 사채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대체로 무담보신용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계금융의 경우, <국민은행 가계금융 이용실태 조사보고서>에 의하여 가계저축을 형태별로 보면 1993년 10월 말 현재 가구당 평균저축액 1066만 8000원 중 86.5%는 제도금융 형태(금융기관예금 및 유가증권)로, 나머지 13.5%는 사금융 형태로 보유되고 있으며 가계부채 형태에 있어서는 가구당 평균 351만 5000원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 중 27%인 94만 8000원을 사금융에 의존하고 있다.
이를 다시 1980년 6월과 비교하면 1980년에는 가계저축의 경우 70.2%가 계나 사채 등 사금융 형태로 보유되고 있었으나 1993년에는 이 비중이 13.5%로 크게 줄었고, 가계부채의 경우에도 1980년에 80%이던 것이 1993년에는 27%로 크게 줄었다.
이는 1982년 11월의 단자회사설립 자유화조치 이래 사채양성화를 위하여 설립된 단기금융기관이 증설되고 가계의 소자금으로도 수익증권에 투자할 수 있는 투자신탁, 서민 금융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신용금고 · 마을금고 · 신용협동조합 등이 증설되어 예금과 대출업무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사금융업무를 흡수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중산층의 안정화 심리가 확산되어 제도금융권을 점차 선호하게 된 까닭도 있다고 본다. 앞의 보고서에 의하면 1981년 가계의 사채 이용을 용도별로 볼 때 ‘재산증식 투자기금’으로서의 사채 보유가 39.3%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제도금융이 가계의 금융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계와 혼합되어 있는 영세규모의 개인기업을 위한 영업자금과 가계의 부동산 또는 증권투자를 위한 자금이었다.
1997년 말 IMF 체제를 맞아 금융경색이 심화되고 신용질서가 다소 어지러워지면서 사금융 시장의 사채업자들이 활기를 띠는 경향이 현저히 눈에 띤다.
이런 때일수록 제도금융은 더욱 가계 부문에 적극적으로 스며들어 비조직적인 사채시장에서 유통되는 가계 저축을 흡수하는 한편, 가계에 필요한 소비자금융과 주택금융을 원활히 공급하여 가계의 금융수요를 충족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사금융과 세제
사채의 이자소득에 대하여 마땅히 소득세를 부과하여야 한다고 현행 세법은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채는 탈세되고 있는 형편인데, 그 주요 원인은 사채에 대한 세제기능의 마비와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세율체계에 있다.
모든 사채거래는 비조직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소득발생을 포착하기 어렵고, 무기명 예금이 허용되는 한편, <예금 · 적금 등의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 있어서 거액의 사채자금이 사실상 세무조사로부터 보호되고 있다.
설사 세무조사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사채거래에 관한 세무조사를 강화한다면, 사금융 시장이 폐쇄됨으로써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들은 자금경색의 충격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법적 · 경제적 요인을 배경으로 사금융은 지하화 · 음성화하여 세금이 없는 높은 이자소득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음성자금의 세원 포착을 위해서는 대금업(貸金業)을 제도화하여 그 이자율을 탄력적으로 운용하고, 자금 출처를 묻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여 사채자금의 양성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사금융은 그 구조적 이중성으로 인해 통화정책의 효율성을 크게 저하시켰고, 나아가서 걷잡을 수 없는 사채행위는 전주(錢主)들의 탈세와 기업이익의 부당한 편식 등으로 경제질서의 형평을 저해해 왔다. 이에 따라 정부는 그때 그때 몇 차례의 사채양성화 대책을 실시하였다. 그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1961년에 제정, 공포된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농촌경제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던 고리채를 정리하기 위하여 실시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1965년에 단행된 금리현실화조치는 그 동안 물가상승률을 훨씬 밑돌던 공금리를 인상, 현실화하여 실질 금리소득을 보장해 줌으로써 사채를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사채이율의 저하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셋째로, 1972년에 실시된 ‘8·3긴급경제조치’를 들 수 있다. 이는 물가와 환율의 상승압박, 통화증발 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분배상의 불균형, 재무구조의 중압현상, 고리채로 인한 금융비용의 앙등 및 합리적 경영능력의 약화 등 경제성장 제약요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단행된 조처이다.
이에 따라, 사채를 동결하고 사채의 유통경로에 적극 개입함과 동시에 <단기금융업법> · <상호신용금고법> 및 <신용협동조합법> 등을 공포, 시행함으로써 사금융 시장의 양성화를 기하였다.
넷째로 이른바 장영자(張英子) 사건을 계기로 사금융을 정비하기 위한 1982년 11월의 단자회사 설립의 자유화 조치를 들 수 있다.
그 해 실명거래를 유인하기 위하여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한편으로는 단자회사설립을 자유화하여 지하자금을 제도금융으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계속적인 양성화시책의 결과, 그 동안 금융질서에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사금융의 폐해도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여전히 금융질서의 정상화와 더불어 사금융의 양성화는 주요 정책과제가 되고 있다. 이는 건전한 경제사회 수립을 위하여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현행 사금융구조의 모순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다음 몇 가지 점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은행을 명실공히 민영화하여 기업성과 효율성을 높이도록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경영을 자율화하여 대출관리에 역점을 두어햐 할 것이다. 둘째, 대금업(貸金業)을 도입 제도화하고 셋째, 통화정책은 우리 나라 금융구조와 실물경제에 알맞은 방향으로 신축성 있게 운영되는 방향으로 다른 정책수단과 조화를 이루면서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넷째, 배당소득에 대한 이중과세의 완화, 주식배당에 대한 종합소득 불산입 등을 위한 대책수립이 요구된다. 다섯째, 자금출처를 묻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여 사채자금의 양성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금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