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제도 ()

법제·행정
제도
민사 · 형사의 재판 및 그에 관련되는 국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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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민사 · 형사의 재판 및 그에 관련되는 국가제도.
갑오개혁 이전의 사법제도

근대적 삼권분립하에서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하여 사법제도는 독립적으로 조직·운영되는 것이 원칙이다.

고대부족국가의 사법제도

초기 부족사회에서는 민중집회에서 재판을 하였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과 10월의 집회 등은 부족들의 연중대회로 가무와 향연을 즐기며, 제천의 종교행사와 아울러 부족적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영고집회에서는 재판을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부족장인 가(加)들의 회의에서 재판을 하였다. 특히 삼한에서는 소도(蘇塗)라고 하여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걸어 ‘별읍(別邑)’이라는 성역을 만들고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냈으며, 죄인이 이 성역으로 피난, 망명한 경우에는 추적, 체포할 수 없게 하여 일종의 비호권이 인정되었다.

부족에 공통되는 법의 제정이나 재판은 영고와 같은 부족집회에서 결정하였고, 부족연맹국에서는 부족평의회를 개최하였다. 신라의 화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회의제적 특징은 왕제국가로 발전한 뒤에도 전제적 왕권이 확립될 때까지 존속하여 왕(부족연맹의 장)이나 재상의 선출·파면·재판, 기타 중요한 국사를 결정하였다. 그 뒤 관료제적 조직이 정비되어 가면서부터 일반적 재판업무는 관료제 조직의 일정한 기관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사법제도

율령제적 통치체제의 확립으로 최고의 재판권을 왕에게 귀속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나, 일반적·구체적으로 어떠한 조직 아래 어떻게 재판권이 행사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고구려 초기에는 감옥이 없었으며, 부족장인 가의 회의에서 평의하여 처결하였다. 이는 당시의 최고 재판기관이었으며, 각 부족에서는 부족장인 가가 재판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는 고이왕 때 6좌평 중에 형옥을 주관하는 조정좌평(朝廷佐平)이라는 사법기관이 설치되었으며, 사형에 해당되는 죄는 지방관이 독단적으로 처결하지 못하고 반드시 중앙에서 신중히 심리하고 5회에 걸쳐 왕의 재가를 받은 뒤에 결정하도록 하였다.

신라도 일찍부터 커다란 사건은 여러 관리들이 평의하여 처결했으며, 화백이나 남당(南堂)에서 국왕의 임석하에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지방관이 재판권을 행사하였고, 수시로 염찰사(廉察使)를 파견하여 재판사무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사건 가운데 중대하거나 의심스러운 것은 중앙의 남당에서 합의하여 처결했으며, 특히 중대한 죄는 왕의 재가를 얻도록 하였다.

대체로 율령체제 초기에는 중죄 아닌 사건을 도사(道使)·성주(城主)·군태수(郡太守) 등 지방관이나 촌락공동체에서 고래의 관습법에 따라 재판권을 행사했을 것이며, 율령체제가 확립된 뒤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질서 있는 조직을 통하여 행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사법제도

사법과 행정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행정관청이 민사·형사 사건을 재판하였다. 중앙정부의 재판기관을 보면, 태조 때 태봉의 제도에 따라 의형대(義刑臺)를 두었다가 뒤에 형관(刑官)으로 고쳤고, 다시 성종 때의 개혁으로 형부(刑部)라고 하였다.

형부는 법률에 관한 사항과 민사재판인 사송(詞訟) 및 형사재판인 상언(詳讞)을 관장하였으며, 뒤에 전법사(典法司), 형조, 언부(讞部), 이부(理部)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문종 때는 노비에 관한 소송을 관장하는 도관(都官)을 설치하였고, 충선왕 때 언부에 병합되었다가 노비송(奴婢訟)이 폭주하여 다시 설치하였다. 원종 때부터는 형조 외에 필요에 따라 특수한 사건을 관장, 재판하는 임시관청을 두었다.

즉, 1269년(원종 10)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1281년(충렬왕 7)의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 1318년(충숙왕 5)의 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과 1320년의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 1365년(공민왕 14)의 형인추정도감(刑人推正都監) 등이었다.

지방재판기관으로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서는 개경부윤이 공양왕 때부터 일체의 민사사건을 재판하였다. 지방에서는 서경은 분대(分臺), 기타는 수령인 유수관(留守官), 부사·목사·지주군사(知州郡事)·현령·감무(監務), 동서의 주진(州鎭)에서는 각계의 병마사(兵馬使)가 초심기관이었으며, 안렴사(按廉使, 按察使)와 계수관(界首官)은 관내 수령의 형정을 감독함과 동시에 2심 재판기관이었다.

성종 때는 각 도의 전운사(轉運使)도 형정사무를 관장하였고, 각 도에 파견되는 안무사(按撫使, 巡撫使)나 공양왕 때 경기지방에 파견되던 염문사(廉問使)도 민형사사건의 상소심으로서 재판하였다.

그 밖에 충렬왕 때 몽고의 제도를 모방하여 도둑 체포와 금란(禁亂)사무를 관장하도록 설치한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도 민간인이 서로 다투는 사건과 소나 말 살해사건은 물론 실제로 권한을 넘어서 노비송을 관장한 일이 있었다.

심급이나 재판 절차는 법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며, 형사재판에서는 작은 일은 5일, 그다지 크지 않은 일은 10일, 큰일은 20일, 도형(徒刑) 이상에 해당하는 죄는 30일 안에 판결하도록 하는 형사재판 정한법(定限法)이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근친간에는 재판관과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없게 하는 상피제도(相避制度), 일반 형사사건은 반드시 3인이 합의하여 처결하게 하며,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는 왕에게 세 번 상주하여 왕과 함께 합의 후 재판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의 폐단이 심하였고, 형사정책은 엄격하지 못하여 사면령이 빈번했으므로 형벌의 권위를 잃었다.

행형제도로 중앙에는 전옥서(典獄署)가 있고, 이를 대리시(大理寺)라고 칭한 때도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수령이 관장하였다.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둥근 집이었고, 수금중인 승중자(承重者: 아버지·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장손)가 부모·조부모상을 당하거나 처가 부상을 당하면 귀휴하게 하고, 수금중인 부인이 산월을 당하면 귀휴하게 하는 휼형제도도 있었다.

민사소송 절차는 조선 초기의 법에 의하여 추정할 수 있다. 당사자주의이고 변론과 증거, 특히 서증(書證)에 따라 재판하였으며, 판결문은 2통을 작성하여 1통은 승소자에게, 1통은 관에 비치하였고, 판결의 확정력의 제도는 불안정하였다. 민사재판에서 적용되는 실체법은 대부분이 확립된 판례법이나 관습법이었다.

조선시대의 사법제도

실체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판도 민사와 형사로 완전히 분화되어 있지 못하였으며, 모든 재판은 무겁고 가벼움의 차이는 있으나 형벌을 결과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거의 모든 재판은 형사재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재판은 옥송(獄訟)과 사송(詞訟)으로 구별된다. 옥송은 오늘날의 형사상의 범죄를 다루는 재판으로 재판의 최종 목적이 공형벌을 과하는 데 있었으며, 사송은 오늘날의 개인간의 생활관계인 민사상의 분쟁을 다루는 재판으로 분쟁 해결이 재판의 최종 목적이었다.

사송을 재판하는 것을 청송(聽訟) 또는 청리(聽理)라고 하여 부동산·노비·소비대차에 관한 것이며, 전토송(田土訟)·산송(山訟)·노비송·채송(債訟) 등이 사송에 속한다.

법전에도 그 절차에 관한 규정을 소원 혹은 청리라는 편목 밑에 규정하였다. 옥송을 재판하는 것을 결옥(決獄) 또는 절옥(折獄)이라 하여, 옥송은 사송과 제도상으로 형식 절차로나 실질적으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사송상의 분쟁, 예컨대 상속재산의 독점, 토지가옥의 침탈, 채무 변제의 불이행 등에는 행위의 반도의성·반사회성이 수반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그러한 행위사실이 있는 경우에는 소송 진행중에 또는 소송 종결 뒤에 부수적이나 병행적으로 형사 처벌을 과하였다. 또 당사자도 소장(訴狀)에서 민사적 분쟁 해결을 요구함과 동시에 형사 처벌도 요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제도나 사안이 민사적 관계를 내포하지 않은 순수한 형사적인 것이 있고, 한편으로는 형벌과 관계없는 순수한 민사적인 것이 있어 둘이 대별되었다.

그러나 사송이라는 하나의 절차에서 사안(事案)의 민사면과 형사면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처리될 수 있었다는 점에 특성이 있으며, 형사적인 사안이 부수될 때마다 처벌함으로써 관령(官令)의 위엄을 세우고, 또 승소자는 같은 소송에서 같은 절차를 통하여 민사적 구제를 받았으며, 동시에 패소자를 처벌함으로써 분쟁의 재발을 예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재판기구에서는 근대적 삼권분립이 없었으므로 국가의 행정기관이 재판을 관장하였다. 중앙집권적이고 전제적인 통치기구에서 사법적·행정적 통치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궁극적으로 국왕으로부터 권한이 부여되고, 임면되는 관료에 의하여 행해졌다.

주·부·군·현은 관료기구의 말단으로서 수령인 목사·부사·군수·현령·현감이 사송과 태형 이하에 해당하는 옥송을 직결하였고, 재판·금령·형구·죄수·감옥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는 형방서리인 아전(衙前)이 수령의 재판사무를 보좌하였으며, 사송도 형방을 경유해야 했기 때문에 아전의 판결에 대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수령은 심급적으로는 제1심이며, 동시에 관찰사로부터 반려된 사건과 전임 관리의 심리사건을 재판하였다. 도(道)에서는 관찰사가 관내의 행정·사법·군사를 통할하고 수령의 감독기관이었으며, 검률(檢律)과 형방서리가 사법사무를 보좌하였다. 관찰사는 도형 이하에 해당하는 옥송을 직결하고, 그 이상의 중죄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사송사건에 관해서는 제2심이며, 수령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에는 관찰사에게 의송(議送: 항소)의 절차에 따라 항소할 수 있으며, 의송에 대하여 관찰사는 실질적 복심은 하지 않고 당해 수령에게 재심 여부를 지시할 뿐이었다.

한성부는 수도의 일반 행정기관인 동시에 사법기관이지만 뒤에 이르러서는 한성부 관할 밖의 토지·가옥에 관한 사송에 대하여 전국에 걸쳐 재판권을 행사하였으며, 제1심·제2심의 기능도 하여 형조와 대등한 기관이 되었다.

형조는 법률·상언·사송·노비를 관장하여 사법 행정의 최고감독기관인 동시에 수령이 관장하는 일반 사송사건의 상소심으로서의 재심기관이며 합의제기관이었다. 유죄(流罪) 이하의 옥송은 직결하나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이 범죄의 재심기관이었다.

형조 밑에는 상복사(詳覆司)·고율사(考律司)·장금사(掌禁司)·장례사(掌隷司)·율학청(律學廳)·전옥서·보민사(保民司)·장례원(掌隷院) 등의 예하 관청이 있고, 장례원은 노비송만을 관장하는 독립 관청으로, 1764년(영조 40)까지 존속하다가 형조에 병합되었다.

의금부는 왕족의 범죄, 국사범, 모역반역죄, 관기문란죄, 사교(邪敎)에 관한 죄, 다른 모든 재판기관에서 적체되거나 판결하기 어려운 사건 등을 심리하는 특별 형사재판기관이었고,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에 대해서는 제3심이었으며, 왕명에 의해서만 개정하였다.

사헌부는 원래 행정 규찰과 시정 논핵 등 일종의 검찰사무를 관장하며, 재판기관은 아니었으나 판결이 심히 부당한 경우에는 사헌부에 상소할 수 있었다. 사헌부는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 재판관을 규탄하며, 이 규탄에 따라 왕명에 의해 지정된 관청 혹은 관리들이 재판했으므로 일종의 검찰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왕은 위 모든 기구 위에 모든 권한의 근원으로, 최고·최종의 재판권은 국왕이 보유, 행사하였으며, 국왕에 대한 상소를 상언이라 하고, 신문고·격쟁(擊錚)·상언 등 특례도 인정되었다.

이상과 같은 일반적 재판기구 외에도 필요에 따라 특별재판기관을 설치하는 일이 있었고, 병사(兵使)·수사(水使)를 비롯한 각 하위 관청, 그리고 형조 이외의 각 조 등에서도 각기의 관할에 관계되는 사소한 민형사재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특별재판 관청과 형조에서만 사법기관의 분화가 있었을 뿐이고, 국왕과 지방관에서는 재판도 행정사무 일반과 함께 같은 사람에 의해서 처리되었다.

형조는 사법기관으로 분화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사무의 분장이라고 하는 일반적 현상의 일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재판기구는 행정기구의 한 측면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어떻든 가장 통일적으로 일관성 있고 명확하게 이용, 운용된 것은 한성부와 도 이하의 지방관청 뿐이었다.

이와 같이 재판권은 일반 행정기관이 관장하지만, 그 기구 및 심급구조는 법전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에 반하는 경우는 월소(越訴)라고 하여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수령-관찰사-형조, 또는 사헌부-상언의 순서를 밟아야 하며, 그것도 그 기관에서 소송을 수리하지 않거나 폐소하여 소송을 심히 지연시킨 경우에 한해서 상소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일이 많았으며, 봉건적 신분관계, 인간관계, 파벌 등으로 자의적 운영에 기울기 쉬웠으므로 재판의 독립성이 약하였다.

요컨대, 사법제도의 특색은 기본적으로 제도로서의 객관적 구조를 갖지 못했으며, 사법권의 내용이 광범하여 행정권을 포함한다기보다는 행정권의 내용에 재판권이 포함되어 있는 점, 즉 행정권의 일부분으로 나타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갑오개혁 이후의 사법제도

정치적으로 구체제를 타파하고 근대 국가로 지향하면서 사회적 개혁을 조직적으로 시작한 것은 1894년의 갑오개혁부터이다.

갑오개혁은 또한 사법제도의 개혁이 특히 두드러졌다. 오직 권한 있는 사법관의 합법적인 재판 절차에 의해서만 형벌을 과하고 민사 분쟁을 처결하도록 하였다.

먼저 중앙에서부터 사법권의 행정권으로부터의 형식적 분리를 실현하고 재판소라는 새로운 명칭과 제도를 창설하였다. 여기에서 비롯된 사법제도의 근대화는 서서히 이루어지면서 오늘에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재판소구성법의 공포

수많은 갑오개혁 법령 중에서 법률 제1호가 「재판소구성법」이었다. 과거 군수나 감사에게 맡겨져 있던 행정관 재판이 인권 침해의 근원이었으므로 「재판소구성법」은 재판사무를 행정사무로부터 분리하여 재판사무 전담기관인 재판소를 창설, 공정한 재판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안전을 보장하고자 한 입법이었다.

재판소라는 독립기관은 동양 법제에는 없던 서구식 제도로 지방관이 평소에 하는 사무의 대부분이 재판사무였던 것을 생각할 때 재판사무의 분리는 지방관 직무의 태반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사법의 근대화가 특히 구체제에 잘 융합되지 못하고 저항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더욱이 서구의 근대 법학교육을 받은 재판사무를 전담하는 법조인이 결여된 상태였으므로 사법제도개혁의 실익을 거둔다는 것은 장래에 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재판소구성법」의 공포는 근대적 사법제도 최초의 도입을 의미하는 획기적 입법이었다.

이 법은 재판소로서 지방재판소·개항시장재판소·순회재판소·고등재판소(뒤의 평리원)·특별법원의 5종 2심제를 예정하고 있었으나, 독립된 재판소로는 한성재판소만이 설치되었다. 고등재판소는 법부에 합설하고 재판장을 법무대신 또는 법부협판 겸임으로 하여 간판을 붙였다.

각 지방재판소는 각 도 관찰부에 합설하고, 각 개항시장재판소는 인천을 비롯하여 각 개항시장의 감리서(監理署)에 합설해서 재판관은 관찰사와 감리가 겸하고 재판소 간판만 붙여 놓았다.

순회재판소와 특별 법원은 임시기관으로 한두 번 임시 개설한 일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한성재판소를 설치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간판에 지나지 않았고, 수령과 감사는 여전히 구식재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명개화의 신풍은 「죄인을 신문함에 있어 고형(拷刑)을 금하는 건」(1894년 7월)을 공포하여 고문하는 악습을 금지하였다.

또 이와 같은 시절에 공포된 「각 부, 각 아문, 각 군문의 체포와 시행을 불허하는 건」·「각 부, 아문, 군문에서 함부로 체포, 시형하지 못하게 하는 건을 각 관(宮)에 적용하는 건」 및 「사법관의 재판 없이 죄벌을 가하지 못하는 건」 등 일련의 진보적 법령의 공포로 관청이라고 관(官) 자만 붙으면 마구 잡아가고 때리고 형벌을 가하던 누습을 근절시킨 것은 구조적인 인권 침해를 구제한 것이며, 사법 근대화의 일대 공적이었다.

소송법규의 정비

갑오개혁 법령인「재판소구성법」의 공포와 검사직제의 공포에 의하여 한성재판소를 비롯하여 각급 재판소에 판사·검사를 임명, 배치하는 한편, 판사·검사의 직업 법조인 양성을 위한 법관양성소이 신설되어 재판기관의 준비작업이 진행되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재판에 필요한 기준 법규로서의 실체법과 재판 수행의 절차법이 제정된 것이었다. 절차법은 실체법과는 달리 재판제도 근대화를 위하여 당장 필요한 법률이었다.

「재판소구성법」의 공포와 동시에 우선 「재판소처무규정통칙」이 제정·공포되었고, 계속하여 「재판소 용지(用紙)에 관한 건」이 고시되어 판사·서기 등 재판소 직원의 사무처리방식이 법령으로 규정되었고, 재판소 특유의 용지까지 지정되어 행정사무에서 완전히 재판사무가 분리, 특유의 사무체제가 확립되었다.

재판의 진행과 소송사무처리에 관해서는 역시 일본인 고문관의 협력을 얻어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는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을 통합하여 간략하게 44조로 집약하고 압축한 「민형소송규정」과 소송물 가격 50냥 이하의 소액사건은 구두로 제소할 수 있게 한 「민형소송절차에 관한 건」이 공포되어 민형소송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판결과 소환장 등 재판소 서류의 송달, 판결의 집행, 재판 법정의 규율유지 등의 목적으로 그 해 7월 「집행처분규칙」과 「정리규칙 廷吏規則」 등이 공포되어 각종 소송법규가 정비되었다.

실체법으로는 「재판소구성법」의 공포와 동시에 「명률을 축조 고정(考訂)하는 건」이 공포되었다. 이는 명률을 형사·민사·군율(軍律)·행정법규 등으로 가려내고 분류하여 국한문으로 형법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드디어 그 해 6월 「법률기초위원회규정」이 공포되었고, 법부에 법률기초위원회가 신설되어 우선 형법전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당장 필요한 특별법을 만들어 사회적·제도적 개혁 요구에 응급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법률이 제정·공포되었다.

1896년 4월 「절도처단예」·「형률명례(刑律名例)」, 1896년 8월 「전보사항범죄처단예」, 1897년 7월 「체신사항범죄처단예」, 1898년 11월 「의뢰외국치손국체자처단예(依賴外國致損國體者處斷例)」, 1900년 1월 「철도사항범죄인처단예」이다. 이들 각 법은 특별 형법에 속하는 것이며, 일반 형법으로서의 『형법대전』은 드디어 1905년 4월에 공포되었다.

원래 『형법대전』의 제정은 홍범 제13조 ‘민법형법을 엄명제정할 것’에 기원을 두는 것이며, 1895년 3월 「명률을 축조 고정하는 건」은 그 정신을 이어받은 입법정책의 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명률을 고정하여 입법하는 과도기적 형법전의 기초는 일본인 고문관의 협력으로 시작되었으며, 일제 세력이 물러간 뒤에도 기초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 뒤 1904년 러일전쟁 시작과 더불어 일제의 내정간섭이 다시 시작되어 그 해 10월 고종은 각부부관제(各部府官制)를 개정하기 위해 관제이정소(官制釐整所)를 특설하는 한편, 형법교정소를 설치하고 법부대신 김가진(金嘉鎭)을 형법교정 총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형법교정관으로 이재곤(李載昆)·김석규(金錫圭)·이상설(李相卨)·정명섭(丁明燮)·윤성보(尹性普)·조경구(趙經九)·김낙헌(金洛憲)·조창진(趙昌鎭) 등을 임명하고, 갑오개혁 이래의 기초로 이미 되어 있는 형법 초고를 다시 추가 교정하여 1905년 4월 총 680조의 『형법대전』을 공포하였다.

『형법대전』은 그 기초자나 형법교정관이 근대 법학지식이 결핍되었던 관계로 『대전통편』이나 『대전회통』과 『대명률』의 조문에 한글로 토만 달았을 뿐 난삽한 구율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형법규정뿐 아니라 형사소송·민사소송 또는 친족상속·제사상장·예법 등에 관한 규정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민사상의 채무자를 처벌하는 규정, 태형·유형 등의 전근대적 형벌도 그대로 두고 있어 구율에 너무 집착한 면이 있었다.

또 전체적으로 형벌이 너무 준엄하고 형법에 정조(正條)가 없어도 율에 근거해서 처벌할 수 있다는 조문을 그대로 두는 것 등으로 보아 과도기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만 『형법대전』은 법부 관원들이 오랫동안 걸려서 기초한 자주적인 입법으로 국권 상실 뒤, 1912년 3월 「조선형사령」이 공포될 때까지 재판소에서 적용한 유일한 실정 형법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입법이었다.

재판소제도의 변동

1904년에 접어들자 한국 재침략 기회를 노리던 일제는 그 해 2월 인천항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수도 서울에 침입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그 해 2월 공수동맹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의 조인을 강취하고 한국에 대한 보호권 설정을 현실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일제는 러일전쟁의 순조로운 진척에 발맞추어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한국에 대한 보호권의 확장과 경제적 이권의 탈취, 한국 내 자국민의 직접 보호를 목적으로 고문정치를 시작하려고 기도하였다. 따라서 외무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일본 공사가 ‘한일외국인고문용빙협정’을 그 해 8월에 체결한 뒤부터는 일제가 추천하는 일본인 고문관과 그 보좌관을 각 부는 물론 각 지방 관청에까지 배치하고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실익을 더욱 굳히기 위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국정감독기관을 서울에 설치할 목적으로 그 해 11월 ‘을사조약’의 조인을 총칼로 강취하였다. 그리고 1905년 2월 서울에 통감부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1906년 9월에는 한국 사법제도를 개혁한다는 명목을 내세우고 고문정치를 재판소에까지 확대하여 법부에 일본인 참여관과 다수의 보좌관을 두었다.

또 각 도재판소, 각 개항장재판소에는 법무보좌관 또는 법무보좌관보를 배치하고 재판소 운영의 실체를 조사, 재판문서에 가인권(加印權)을 행사하여 재판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였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밀사사건을 트집 잡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을 양위에 몰아 넣고, 그 해 7월 전격적으로 이완용(李完用)으로부터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의 조인을 받아냈다.

이 조약으로 일제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하는 권한과 이 조약에 붙인 부속 서류인 ‘실행각서’로 재판제도를 개편하여 일본 재판제도 그대로, 대심원(1개 소)·공소원(控訴院, 3개 소)·지방재판소(8개 소)·구재판소(중요 군청 소재지)와 같은 3심급 4종의 각급 재판소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원장과 소장은 전부 일본인으로 임명하고 판사와 서기도 다수 일본인 판사와 서기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각급 재판소에 부치되는 검사국의 장도 일본인 검사로 임명할 것은 물론, 검사와 서기도 일본인을 대량으로 임명하도록 규정하였다.

‘정미7조약’은 실행 각서의 내용으로 보아 재판소를 통한 사법권 쟁취에 목적을 둔 것이 분명했으며, 이 조약에 의거하여 그 해 12월 「재판소구성법」과 「재판소설치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2월부터 각급 재판소와 검사국의 장은 물론 많은 일본인 판·검사가 임명되고, 8월에는 각급 재판소와 검사국이 일제히 개설되었다. 이렇게 되니 한국 재판소란 이름뿐이고 알맹이는 일본 재판소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사법권의 실질적 쟁취에도 만족하지 않고 1909년 7월 추밀원(樞密院) 의장으로 복귀한 이토 히로부미는 신·구 통감 이취임식 전에 참석차 방한한 기회를 타고 사법권 강탈의 기정 방침에 따라 이완용을 불러 강압하고 ‘한국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 이른바 ‘을유각서’를 7월에 교환하였다.

을유각서는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 재판소를 없애고, 그 대신 한국에 일본법에 의한 일본 재판소를 신설하고, 한국 재판사무를 빼앗아 일본 재판소(통감부재판소)가 담당한다는 사법권 탈취에 관한 조약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 사법권은 일제에 탈취당하고, 그 해 10월 「통감부재판령」·「통감부재판소사법사무취급령」·「통감부사법청관제」·「통감부감옥관제」 등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부터 통감부재판소로 고등법원·공소원·지방재판소 및 구재판소가 개설되었으며, 한국 정부의 대심원·공소원·지방재판소 및 구재판소는 각각 폐지되고, 계류중인 소송사무와 그 요원은 각급 통감부재판소에 그대로 인계되었다.

통감부재판소는 3심급 4종으로 과거 한국재판소와 같으나, 다만 대심원의 명칭만을 고등법원이라고 개칭하였을 뿐이다. 통감부재판소와 검사국의 판사와 검사는 일본 법제에 의한 유자격자(고등고시 합격자)라야 되었다.

따라서 한국인 판검사의 채용은 유자격자 장벽에 부딪쳐 임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해 10월 「통감부판검사임명에 관한 건」을 제정·공포하여 한국인은 유자격자가 아니라도 판검사에 특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 해 11월부로 고등법원장 이하 각급 재판소장, 고등법원 검사장 이하 각급 검사장과 각급 판검사가 앉은 자리에서 새로 통감부의 임명장을 받는 형식을 취하여 한국 재판소를 인수 인계하였다.

법관양성소

「재판소구성법」의 공포와 같은 날 「법관양성소규정」이 공포되었다. 이는 근대 법학 도입을 위한 최초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재판소를 운영할 판사·검사 등 직업적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법부참서관을 소장에 겸무시키고, 6개월간의 단기 속성으로 법학통론·민법·형법·민형소송법 등 근대 법학을 강의하였다.

그 해 4월 법관양성소가 개설되어 제1기생으로 50명을 입학시켰고, 계속해서 6월에는 제2기생 50명을 입학시켰다. 제1기생은 1895년 11월 47명이 졸업하였고, 제2기생은 1896년 4월 38명이 졸업하였으나 때마침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일제 세력이 갑자기 후퇴하게 되어 법관양성소는 2기생의 졸업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1903년에 이르러 일제의 재침략과 때를 같이 하여 법관양성소가 다시 문을 열었다. 1903년 2월에 학생을 모집하여 일부는 다음해 7월에 제3기생으로 졸업시키고, 일부는 1905년 12월에 제4기생으로 졸업시켰다.

1905년 4월에는 「법관양성소규칙」을 제정하여 수업연한을 3년으로 개정하고, 제5기생과 제6기생을 졸업시킨 것을 마지막으로 학칙이 변경되어 법부 소속의 법관양성소는 폐지되고, 학부 소속의 법학교로 계속하다가 전수학교로 변경되었으며, 나중에 법학전문학교로 되어 많은 법학도를 양성하였다.

변호사제도의 창시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과 때를 같이하여 최초의 「변호사법」이 공포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신제의 재판소와 판검사의 관직이 창설되었지만, 변호사직은 탄생하지 못하였다.

이 「변호사법」의 공포는 사법제도 근대화를 진일보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변호사법」이 공포되었지만 변호사 등록이 개시된 것은 1906년부터이며, 그 해 등록한 변호사는 홍재기(洪在旗)·이면우(李冕宇)·정명섭(丁明燮) 3명이었다. 1907년에 등록한 변호사는 심종대(沈鍾大) 이하 17명이었다.

원래 변호사는 변호사회에 가입해야 변호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변호사법」에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들 최초의 변호사들은 회조직 직전에 먼저 탄생한 것이다. 변호사회가 생긴 것은 1907년 9월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면우 이하 10명의 변호사가 최초의 변호사회, 즉 전국 유일의 한성변호사회를 조직한 것이라고 풀이된다.

1909년 4월 「변호사법」이 새로 공포되어 일본 변호사법과 같이 각 지방재판소 단위로 변호사 등록을 하도록 개정되었다. 따라서 변호사회는 지방별로 조직하게 되었다. ‘을유각서’로 사법권을 강탈한 통감부는 1909년 10월 「통감부변호사규칙」을 새로 다시 공포하고, 한국 변호사뿐 아니라 일본인 변호사도 같이 등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사법제도

1910년 8월 일제는 한국을 강점함과 동시에 통감부를 폐지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그 해 10월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을 공포하고, 통감부 재판소의 간판을 각급 조선총독부재판소로 바꾸었으며, 통감부재판소 사무를 조선총독부재판소에 인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1912년 3월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을 개정하여 고등법원 아래 공소원을 복심법원이라고 개칭하고 초심인 지방재판소를 지방법원으로, 이전의 구재판소를 지방법원 지원으로 변경하여 재판소를 3종3심제로 정비하였다. 각급 검사국을 각급 법원에 부치하고 지방법원 지원에는 검사국 분국을 부설하였다.

재판소의 명칭을 법원으로 통일한 이 제도는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이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사법제도가 전시체제로 바뀔 때까지 33년간 계속 존속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점점 가열되어 말기에 접어들자 일제는 1944년 「재판소구성법 전시특례」를 제정하고, 민형사재판을 전면적으로 2심제로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그 해 2월 조선총독부도 「재판소전시특례」를 제정, 공포하여 그 해 3월부터 시행하였다.

전시특례에 의한 재판소의 개편을 보면, 민형사사건 재판에 대한 전면적 2심제 채택은 물론, 지방법원 단독판사의 재판관할권을 대폭 확장하였다.

그리고 복심법원을 상고재판소로 하고 지방법원 단독판사의 재판에 대한 상고사건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고등법원은 지방법원합의부사건에 대한 상고만을 심리하도록 하였다.

미군정기의 사법제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과 더불어 그 해 9월 서울에 들어온 미군은 미군정의 시행을 선언하고 초대 군정장관에 아놀드(Arnold,A.L.)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일제강점기의 악법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예방구금규칙」·「치안유지법」·「출판규칙」·「사상범보호관찰규칙」, 기타 정치적 탄압이나 민족적 차별을 목적으로 하는 법령을 폐지하여 광범위한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사법기관의 재건에 관해서는 미군 장교를 법무국장에 임명하고, 사법행정사무를 시작하였다. 미군정 방침으로서는 법무국장과 그 보좌관을 제외하고는 법무국의 구성은 물론 각급 법원과 검사국의 구성을 전부 조선 법조인의 자치와 자율에 맡겼다. 1946년 3월 조선총독부 각 국을 부로 승격하는 바람에 법무국은 사법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사법부장 코네리는 사법부장 밑에 행정·법무·법제의 3차장을 두고, 행정차장은 총무국·감찰국·변호사국을, 법무차장은 법원국·검찰국·형사국을, 법제차장은 소청국(訴請局)·법제국·법률조사국을 담당하게 하고 재야 법조인을 대거 기용하였다.

법원에 관해서는 독립국가에 알맞는 재판소 구성을 목표로 연구 끝에 구 고등법원을 대법원으로, 복심법원을 공소원으로 개칭하고, 그 해 10월 일본인 법관의 일체 철수로 비어 있던 각급 법원의 판사를 상급 법원부터 충원하였다.

일본의 고등문관시험 또는 조선변호사시험 등에 합격한 기성 법조인이 다수 있었던 관계로 사법부 상급 요원은 쉽게 확보할 수 있었으나 하급 판검사로 취직하는 일은 기피하고 있어 다년간 서기직에 있던 직원을 다수 등용하였다.

해방과 동시에 일제 통치의 반동으로 제도면에의 일제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 정치적 목표였던 관계로 재판소 및 검사국의 기구개혁은 일찍부터 논의되고 있었다.

1946년 8월 사법부장 김병로(金炳魯)는 법조인을 대표하여 3심제 부활, 재판소와 검사국의 분리, 사법권의 독립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법부 기구개혁건의서를 군정장관 앞으로 제출하였다.

군정장관의 인준을 얻어 그 해 12월 사법부장 명령으로 법원과 검사국의 명칭을 대법원·고등심리원·지방심리원·대검찰청·고등검찰청·지방검찰청 등으로 바꾸고, 대법원판사는 대법관, 기타 판사는 심판관, 검사는 검찰관 등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명칭을 변경하는 데 문제점이 많았으나, 검찰기관을 재판소 부설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뛰어난 견해였다고 할 수 있고, 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도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미군정은 기본권 인권 옹호에는 처음부터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정치적 자유의 보장, 언론의 자유, 노동운동의 계몽 등에 공헌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개혁은 불법 구속에 대한 국민의 자유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한 1948년 3월의 ‘형사소송법의 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정의 목적은 ‘구속적부심사제도’의 도입에 있는 것이며, 구속적부심사제도는 제1공화국 이후 사법제도로 정착되었다. 이는 제4공화국의 유신헌법으로 일단 폐지되기도 했으나, 제5공화국 헌법에서 복구, 환원되었다.

미군정의 또 하나의 공헌은 사법제도의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미군정 말기인 1948년에 접어들어 그 해 5월 「법원조직법」과 「사법서사법」, 그 해 7월 「변호사법」, 그 해 8월 「검찰청법」을 제정, 공포한 것이다.

「법원조직법」은 법률심사권을 대법원에 전담시키는 것이며, 사법 우월주의의 미국식 사법제도를 지향한 진보적 입법이었으며, 재판소의 명칭도 법원으로 환원하고 법관도 판사로 환원하였다.

정부수립 이후의 사법제도

, 사법제도의 변혁

1948년 7월 공포된 제1공화국 헌법은 사법권 독립을 확립하였다. 사법권은 법관에 의해 조직된 법원이 이를 행사하고,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독립하여 심판하며,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하고, 법관은 탄핵·형벌 또는 징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정직 또는 감봉되지 아니한다.

법령심사권에 관해서 법원은 명령심사권만 가지고, 법률의 위헌 여부에 대한 법률심사권은 별도로 설치한 헌법위원회의 관할에 맡기기로 하였다.

새 「법원조직법」은 대법원·고등법원·지방법원의 3심제를 채택하고, 대법원에는 9명 이내의 대법관을 두며, 대법관의 임명과 대법원장 보직은 대법원장·대법관·고등법원으로 구성된 법관회의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행하고, 판사의 임명은 대법관회의의 결의에 의해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행하며, 판사의 보직은 대법원장이 행하였다.

대법관회의는 이러한 임명·보직뿐만 아니라 법원규칙 제정에 관한 사항, 법원행정처장·차장 및 대법원 서기국장의 임명에 관한 사항, 판례의 조사·수집·간행에 관한 사항, 예산 및 결산에 관한 사항 등을 처리하는 사법부 최고의 결의기관이었다.

별도로 대법원에는 법원행정사무처리기관으로 법원행정처를 설치하고, 총무국·법정국을 두었으며, 총무국에서는 서무·인사·회계·용도 등의 사무를, 법정국에서는 호적·등기·집달리·사법서사 등에 관한 사무를 하게 하였다.

1962년 12월에 공포된 제3공화국의 개정헌법은 헌법재판소를 폐지하고 법률을 포함한 모든 법령심사권을 대법원의 전속 관할로 환원하였다. 또한, 대법원으로 하여금 법의 통일과 확립을 기하는 사법우월제를 택하고, 대법원장의 임명권을 확장하여 법원과 법관의 독립은 물론, 법원행정의 독립도 인정하였다.

즉, 법관추천회의를 창설하여 대법원장은 이 회의의 추천을 통해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얻어서 임명하고, 대법원판사(종전 대법관)는 이 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하며, 일반 법관은 대법원장이 직접 임명하도록 하였다.

대법원은 대법원장 및 15인의 대법원판사로 구성하고 상고사건, 각종 항고사건, 기타 법률에 의하여 대법원의 권한에 속하는 사건 등을 종심으로 재판하였다.

고등법원은 서울·대구·광주에 두고, 지방법원 및 가정법원 합의부의 항소사건 및 항고사건, 기타 법률에 의해 고등법원에 속하는 사건을 재판하였다.

지방법원은 서울에 민사지방법원·형사지방법원·가정법원을 두고, 춘천·청주·대전·대구·부산·광주·전주·제주에 각 지방법원을, 중요 도시에는 지원을 두어 제1심 소송을 담당하였다.

검찰청은 「검찰청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대검찰청·고등검찰청·지방검찰청 및 지청을 각 법원 소재지에 설치하고, 대검찰청에는 검찰총장을, 고등검찰청과 지방검찰청에는 검사장을 두었다.

검사는 법령에 의하여 그 권한에 속하는 사항 외에 형사사건에 관하여 공익의 대표자로서 범죄의 수사, 공소의 제기 및 유지에 필요한 행위, 범죄수사에 관하여 사법경찰관리를 지휘·감독하고, 법원에 대한 법령의 정당한 적용의 청구, 재판 집행의 지휘·감독에 대한 권한을 가졌다.

검사는 검찰사무에 관하여 상사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고, 검찰총장과 검사장은 소속 검사의 직무를 자신이 처리하거나 또는 다른 검사에게 처리시킬 수 있었다.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감독자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으로 검찰총장도 지휘·감독하였다.

그러나 1972년 10월에 개정된 이른바 유신헌법은 대법원의 법령심사권을 수정하여 다시 헌법위원회를 신설하고, 법률심사권과 탄핵 및 정당 해산을 관할하게 하여 제1공화국의 제헌헌법으로 돌아갔다.

또 법관의 임명에서 임기 6년의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장 이외 임기 10년의 일반 법관은 대법원장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법관의 보직도 대법원장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행하는 것으로 개정하여 임명권과 보직권을 대통령이 장악하게 하였다.

1973년 1월 비상국무회의는 해산된 국회의 입법권을 대행하고 「법원조직법」·「법관징계법」·「검찰청법」·「변호사법」·「형사소송법」 등 사법에 관한 5개 법률을 개정하였다.

「법원조직법」의 개정에서는 지방법원합의부 관할의 소송물 가격을 인상하고, 각급 법원장과 부장판사의 임명 자격인 법조 경력도 인상했으며, 법관의 정년은 인하하였다.

「검찰청법」의 개정은 「법원조직법」의 개정에 맞춘 것이고, 「변호사법」의 개정은 변호사에 대한 사명규정 신설과 법률사무취급단속법을 변호사법에 편입시키고 벌칙을 강화한 데 있다. 「형사소송법」의 개정에서는 인권 보장의 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는 구속적부심사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밖에도 보석·구속취소·구속집행정지결정 등에 대한 검사의 즉시항고권이 신설되는 등 인권에 관한 주목할 만한 개정이 많았다.

기본법의 제정

재판 수행에 필요한 기본법으로는 실체법인 민법·상법·형법 등과 절차법인 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행정소송법 등 무수한 법률과 명령 등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출범부터 모든 법전을 만들어야 했지만, 광복 초기의 국가로서 기본 법전이 공백에 가까웠다.

하루아침에 이러한 많은 법전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므로 미군정에서도 1945년 11월 “종래의 법령 및 조선총독부가 공포하였고 유효한 법령은 군정 명령으로 폐지할 때까지 존속한다.”로 그 많은 일제 법령을 적용하고 존속시켰다.

전례에 따라 신헌법도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라는 경과규정을 두었다. 그러므로 일제 법령에 대치할 기본 법령을 속히 만드는 입법사업은 국회와 신정부의 우선적인 중대 임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 기본법의 입법작업은 지지부진하여 1953년 9월 「형법」, 1954년 9월 「형사소송법」, 1955년 7월 「행정소송법」, 1958년 2월 「민법」, 1960년 1월 「부동산등기법」·「호적법」과 같은 민사법과 형사법을 제정, 공포하는 데 그치고, 많은 법령을 조선총독부 시대의 일본어로 된 법령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본법 제정에 크게 공헌한 것은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최고회의였다. 최고회의는 1961년 7월 「구법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하고 구법정리위원회를 설치하여, 그 해 12월까지 일제 치하의 모든 일제 법령과 미군 정치 아래의 군정 법령을 모두 정리하여 기본법을 비롯하여 각종 법률·명령·규칙·규정 등을 우리말로 고칠 것은 고쳐서 새 법령으로 공포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하여 구 법령 정리를 끝내도록 한 것이다.

정리 결과를 보면 일본 법률 79, 일본 칙령 71, 일본 제령 103, 총독부령 243, 구도령(舊道令) 18, 미군정 법령 35, 기타 66을 정리한 대신, 이에 대치할 신법률 213, 신각령 84, 신부령 8을 제정, 공포하여 한꺼번에 기본법 제정 문제를 해결하였다.

법관의 자격시험과 법관양성기관

1945년 10월에 미군정 명령으로 일본인 판검사가 일제히 해임되어 판검사 자리의 태반이 비게 되자, 각급 법원과 검찰의 장을 비롯하여 상급 법관은 대부분 재야 법조인으로 충당이 가능했으나, 하급 판검사는 크게 모자랐다.

우선, 상급 판검사를 임명하여 각급 법원과 검찰국을 인수인계하고 개청하기에 바빴다. 모자라는 판검사를 충당하기 위해 대법원에서는 1946년 3월에 6개월간의 단기 속성교육을 위하여 사법요원양성소를 신설하고, 그 해 7월 50명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시설과 예산 부족으로 당초의 교육계획을 포기하고 모집생 전원을 그대로 ‘사법관시보’에 임명했다가, 다음해 4월 모두 판검사로 임명하였다. 그 해 9월 대법원장은 사법부장과 협의 끝에 서기를 판검사에 등용하기로 하고, 판검사 특별 임용시험을 실시하여 법원과 검찰의 서기를 대량으로 판검사에 등용하였다.

사법부장은 조선변호사시험을 부활하기로 하고, 1947년 3월 「조선변호사시험규칙」을 공포한 후, 그 해 7월 제1회, 1948년 7월 제2회, 1949년 7월에 제3회의 조선변호사시험을 실시하여 100여 명의 합격자를 배출해서 대부분을 판검사로 등용하였다.

1948년에 수립된 신정부는 「정부조직법」으로 고시위원회를 특설하고 고급공무원 자격의 고등고시를 고시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1949년 8월 「고등고시령」을 공포하여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으로 판검사·변호사의 자격시험을 대치하게 되어 변호사시험은 3회로 폐지되었다. 그 해 12월 제1회 고등고시(사법과 시험)를 실시하여 16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정부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하게 되자 그 해의 고등고시는 중단되었고, 판검사와 변호사로서 이북으로 납치된 자가 적지 않았으므로, 정부는 그 해 12월 부산에서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법」을 제정,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고시위원회는 이에 자극을 받아 고등고시를 부산에서 계속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7월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를, 1952년 제3회를 시행하였으며, 이는 정부의 서울 수복 때까지 계속 실시되었다.

1952년에는 고등고시와 아울러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법」에 의한 제1회 임용시험도 실시하여 합격자를 공석중의 판검사에 임명하였다. 이 임용시험은 1956년에 정부가 수복된 뒤에도 판검사직의 공석이 많았으므로 제2회 특별임용시험을 실시한 바 있다.

수복 후에도 고등고시는 꾸준히 계속되어 법조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1962년 제3공화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개정, 공포되어 고시위원회가 없어지게 되자, 1963년 3월 제16회 고시로 고등고시제는 폐지되고, 1963년 5월 「사법시험령」이 공포되었으며, 그 해 7월 제1회 사법시험이 실시되어 25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 때부터 사법시험을 통한 법조인시대가 개막되었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뒤 법조인 양성 전문의 교육기관이 탄생하였다. 이는 1962년 2월 「국립학교설치령」 개정에 의하여 법조인 양성기관으로 서울대학교에 사법대학원이 설치된 데에서 비롯된다.

그 해 4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구내에 수업연한 2년의 사법대학원이 개설되고, 그 해 4월 고등고시 사법과 제14회 합격자 42명이 제1기생으로 입학했으며, 9월에 고등고시 제15회 합격자 38명이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63년 3월에는 고등고시 제16회 합격자 62명이 제3기생으로 입학했으며, 9월에는 사법시험 제1회 합격자 30명이 처음으로 입학하였다. 계속해서 1970년 4월 사법시험 제14기생까지 입학시켰으나, 1971년 1월 대법원에 사법연수원이 개설됨에 따라 사법대학원은 폐지되고, 사법연수원에 인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9년 5월 28일 개정된 「변호사시험법」 제1조 “부칙 제2조는 2017년 12월 31일 시행한다.” 부칙 제2조 “사법시험법은 폐지한다.”에 따라 2017년 12월 31일 사법시험은 폐지되었다.

변호사제도의 변천

1905년 11월 「광무변호사법」이 처음으로 공포된 뒤 변호사법의 변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05년 11월 「광무변호사법」, 1909년 4월 「융희변호사법」, 1909년 10월 「통감부변호사규칙」, 1910년 12월 「조선변호사규칙」, 1936년 4월 「조선변호사령」, 1945년 11월 미군정 명령 「조선변호사에 관한 명령」, 1948년 7월 미군정 법령 「변호사법」, 1949년 11월 대한민국 「변호사법」, 1973년 1월 「변호사법」 개정 등이다.

이처럼 한국의 변호사법은 폐지와 공포를 거듭하여 다양한 법적 연혁을 거치게 되었다. 현행 「변호사법」은 「광무변호사법」 이래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는 변호사인가제를 고집하고 있던 것을 폐지한 것, 각 지방 단위의 변호사회밖에 인정하지 않하던 구 제도를 깨고 전국적인 변호사회의 연합회를 설치한 것, 변호사의 사명규정을 신설하여 변호사의 긍지를 높여준 것 등은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적인 변호사법이 되기 위해서는 외국 변호사법제와 같이 변호사 등록의 자유, 변호사 징계의 자치, 변호사회칙 제정의 자유, 변호사회의 회의와 의사결의의 자치 등이 보장되어야 하지만, 현행 「변호사법」은 이들 사항이 모두 법무부 장관의 감독 아래에 있다.

변호사제도에 관하여 특기할 만한 일은 1970년 12월 간이 절차에 의한 「민사분쟁사건처리법」을 공포한 것이다. 이 법의 공포로 인하여 변호사는 서울에서는 5인 이상(지방에서는 3인 이상)이 합동하면 합동법률사무소를 설립할 수 있고, 동시에 합동법률사무소는 공증업무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변호사사』(대한변호사협회, 1979)
『한국검찰사』(대검찰청, 1976)
『근대한국재판사』(김병화, 한국사법행정학회, 1974)
『한국사법부개요』(대법원, 1971)
『한국변협요람』(전봉덕,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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