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을 비롯한 논설위원들의 합의로 그 견해나 주장을 결정한 다음 논설위원 중의 한 명이 무기명으로 집필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집필위원들의 개인적 의견이나 주관을 게재해서는 안 된다.
사설의 주제는 시대의 공동 관심사로 등장하는 지속적인 의미를 지니는 문제이다. 그리고 사설은 객관적으로 보아 신문사의 의견이지 집필자 개인의 견해는 아니다. 따라서 사설은 시대의 변화와 신문사의 성격에 따른 특징과 논조를 지니게 된다.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나라 신문도 사회사의 변천에 따라 사설의 자세가 제각기 달랐다. 우리 나라 신문의 사설은 개화기시대에 국민계몽이라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 창간호의 <순보서 旬報序>는 개국 진취와 국민계몽의 임무가 창간 동기임을 밝혔고,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신문 獨立新聞≫ 창간사는 민주정신에 입각한 국민계몽과 자주독립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계몽 논조는 그 이후의 민간지들에 계속 이어졌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이 땅이 사실상 일제 식민지로 전락되자 망국에 대한 비분과 일제에 대한 저항을 호소하는 강한 사설이 등장하였다.
당대의 ≪제국신문 帝國新聞≫·≪황성신문 皇城新聞≫·≪만세보 萬歲報≫·≪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등의 민간지들이 이런 사설을 주도해 갔다.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로 널리 알려진 ≪황성신문≫은 특히 뛰어난 사설로 독자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일제하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족의식의 고양, 민족문화 진작을 부르짖는 사설로 일제에 도전하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창간 6개월 만에 <자연의 化>라는 사설과 <祭祀問題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로 정간 처분을 받았다.
특히, ≪조선일보≫는 정간이 풀린 직후 <愚劣한 조선총독 당국자는 何故로 우리 일보에 정간을 명하였나뇨>라는 항의 사설을 쓰고, 또 즉각 무기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항일의 민족주의적 사설은 일제하에서 시종일관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일제의 언론 탄압이 점점 가혹해지는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예전과 같은 통쾌한 항일 사설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단지 농촌계몽활동·민족문화보존운동 또는 조선어과 폐지에 대한 반대운동에 관한 사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의례적이고 정기적인 시국 협조 사설이나 생활 주변의 주제를 다룬 사설로 그쳤다.
광복 직후는 명실상부한 언론자유시대이면서 좌우익 대립시대였던 만큼 사설도 각 신문의 사상적 색채에 따라 개성이 뚜렷하였다.
특히, ‘인민공화국’을 부인한 미군정 장관 아놀드(Arnold,W.H.)의 성명을 둘러싼 각 신문의 반응이 사설을 통하여 일제히 표명되었고,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쟁이 사설을 통해 벌어졌던 사실이 특기할 만하였다.
이러한 논쟁적 사설은 자유당 정권에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비판적 언론의 역할로 이어져 갔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후의 사설은 비판보다는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논리에서 ‘언론의 책임’, ‘언론의 품위’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는 4·19혁명 직후 언론 자유의 혼란으로 정론지 성격의 사설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신문 경영이 기업화의 성장을 보이며, 기업의 독립성을 기초로 언론이 공정무사 또는 공익성을 위해 활동을 하는 데에서도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또, 신문이 전국지로 발전함에 따라 특정 계층만을 상대로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을 상대로 해서 신문을 만들 수밖에 없으므로 개성 있는 신문을 만들기가 어렵게 되었다.
현재의 사설은 그때 그때의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대해 독자의 입장에서 비평을 가함과 동시에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해설의 역할을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즉, 사설을 집필하는 언론인들의 ‘전문화 추세’가 서서히 관철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설의 취급 범위도 무제한적으로 광범위해 가고 있는 경향이다. 특정한 시사문제를 떠나서 생활·철학·윤리 등의 선택된 주제를 사설로 다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설은 신문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는 개성을 지녀야 함과 동시에 독자의 건전한 여론 형성에 기여한다는 ‘일보 앞서는’ 구실을 해야 한다.
따라서 공중에 대한 영향력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이 사설 집필에 주어져야 하며, 사설 집필은 신문의 윤리에 입각하여 독자의 민도(民度)를 향상시키는 구실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