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사택지적비

  • 역사
  • 유적
  • 삼국
  • 국가문화유산
백제시대의 비석.
국가문화유산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노중국 (계명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사택 지적비 미디어 정보

사택 지적비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백제시대의 비석.

내용

201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의자왕 때의 대신 사택지적이 남긴 비이다. 1948년 역사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황수영(黃壽永)과 홍사준(洪思俊)이 부여에서 발견하여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비는 대좌평(大佐平)을 역임하였던 사택지적이 말년에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이다. 남아 있는 비의 형태는 높이 101㎝, 너비 38㎝, 두께 29㎝이며, 글씨를 쓰기 위하여 정간(井間)을 쳤다. 정간은 정방형으로서 한 변이 7.6㎝이며, 글자의 크기는 평균 약 4.5㎝이다. 그리고 비석 오른쪽에는 원내에 봉황문이 있고 주색(朱色)을 칠한 흔적을 약간 볼 수 있다.

비문의 전문을 보면 “갑인년 정월 9일 나지성의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쉬이 가고 달로 쉽게 돌아오기 어려움을 한탄하고 슬퍼하여,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외외한 자비로운 모습은 신광(神光)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아아한 인혜로운 모습은 성명(聖明)을 풀어서 □□한 듯하다(甲寅年正月九日奈祗城砂宅智積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 還穿金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吐神光以送雲峨峨悲貌合聖明以).”라고 되어 있다.

이 비문의 문체는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인데 문장이 유려하고 자체가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서, 당시 백제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이 비는 문체나 비의 양식이라든가 비문에 나타나는 인물 등으로 보아 비록 단비(斷碑)이기는 하나 백제시대의 귀중한 금석문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 - 『삼국사기(三國史記)』

  • - 『일본서기(日本書紀)』

  • - 「사비시대 백제지배체제의 변천」(노중국, 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1981)

  • - 「백제사택지적비에 대하여」(홍사준, 『역사학보』6, 역사학회, 1954)

  • - 「백제인물고」(이홍직, 『서울대학교논문집』1, 1954)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