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방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관리는 그 지방에 파견되지 못하게 하는 것 등도 이에 포함된다.
이 제도는 인정(人情)에 따른 권력의 집중을 막아 관료 체계가 정당하고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따라서 각 시대마다 독특한 관료 체계의 조직·운영·특성 또는 친족 관계의 법제와 밀접한 관련 아래 구성, 운영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씨족 의식 혹은 문중 의식이 강하여 문벌을 형성하고, 또 사돈의 8촌까지도 찾는 전통적인 관습, 그리고 권력과 부를 동시에 얻는 첩경(捷徑)인 관리 등용문이 매우 좁았다는 사정을 참작한다면, 관료 조직의 운영 과정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녔음에 틀림없다.
골품제(骨品制) 하의 신라에서 재상급에 속하는 최고위 관직에서만 부자간의 상피가 행해졌던 단편적인 사례가 발견된다. 그러나 상피제(相避制)는 관료제의 발전과 표리 관계를 이루고 발전되었기 때문에, 성문화된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였다.
고려의 상피제는 1092년(선종 9)에 제정되어 오복친제(五服親制)에 바탕을 두고 실시되었다. 적용되는 친족 범위는 본족(本族)과 모족(母族)·처족의 4촌 이내와 그 배우자로 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성(臺省)의 경우 사돈 간에도 상피가 적용되었다.
고려의 상피제는 외족과 처족은 모제(母制)인 송나라 제도와 비슷했지만, 본족에 있어서는 그 적용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던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적용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는 신라나 고려에 비해 상피제의 적용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관료제를 지향했던 사회였기 때문에 진골귀족의 신라나 이성귀족(異姓貴族)으로 구성된 고려의 귀족제 사회보다는 왕권의 집권화와 관료 체계의 질서확립 과정에서 권력 분산이 더욱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상피제 규정은 세종 때에 성립되었다. 적용 범위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친족·외족·처족 등의 4촌 이내로 한정했으나, 법외(法外)에까지 확대,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의정부를 비롯, 병권을 전장(專掌)하는 군사기관과 법을 다스리는 청송관(聽訟官)과 고시관(考試官) 등 거의 모든 관직에 적용되었고 고려시대에 비해 엄격히 적용되었던 점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