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영친왕과 일본 황족 간의 정략결혼을 저지하기 위해 폭탄 투척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재학 중 고향에서 학비가 오지 않아 신문배달·직공노릇·인삼장사 등을 하면서 고학하였다. 일본의 동화정책에 적극 반대해 “만약, 대사를 일으킨다면 내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황족 방자[梨本宮方子]와의 가례일(嘉禮日)이 1920년 4월 29일로 발표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서상한은 우편배달부로 가장해 이은의 가례행렬에 투탄하고, 이어 일본 내무성과 외무성을 폭파하고, 사이토[齋藤實] 조선총독과 이완용(李完用)을 폭살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일본인 학생 이마카와[今川生郎]·우에무라[上村劤作] 등과 폭탄을 제조, 동경(東京) 오지(王子)에서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였다. 거사준비 중 일본경찰의 밀정인 주오대학[中央大學] 학생인 신모(申某)의 밀고로 그 해 4월 11일에 붙잡혀 서상한의 계획은 거사일을 목전에 두고 좌절되었다.
1920년 7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해 9월 22일 동경공소원에서 금고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재일조선인의 노동운동에 진력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黑友會) 및 동흥조선노동동맹(東興朝鮮勞動同盟)과 제휴해 1936년 자택을 동흥조선노동동맹 사무실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광복이 될 때까지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경찰에 잡혀, 투옥된 독립운동가를 뒷바라지하는 등 항일민족운동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서사한이 죽자 재일교포사회에서는 사회장에 준하는 단체장의 예로써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그 뒤 1975년 유해를 한국으로 옮겨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기려수필(騎驢隨筆)』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한국독립운동사』1∼5(국사편찬위원회, 1965∼1969)
-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 유신사,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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