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은 바다와는 약 1㎞ 떨어져 있는 해안지역의 낮은 구릉지대에 있다.
1991년 12월 민무늬토기편과 석기류, 원삼국시대의 토기편 등이 발견, 신고되어 알려졌다. 국립부여박물관은 1992년 1월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해 주변에서 다량의 무문토기편과 석기를 수습하였으며, 1980년 북쪽 구릉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간돌검 1점과 돌살촉 24점이 발견된 것과 더불어 이 지역에 대규모의 마을 유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유물 분포상태로 보아 유적의 형성범위는 수만 평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유적이 있는 중심 구릉의 정상부는 해발 63.3m이며, 정상부 바로 아래에는 둘레 320m의 백제시대의 테뫼식 산성이 있다.
발굴조사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조사지역은 동서(N-30-W)로 길게 형성된 구릉 정상부의 해발 56∼57m 정도의 평탄지대의 북서쪽부분이다. 조사 결과, ‘송국리형 집터’ 6기와 원삼국시대의 장방형 유구와 부정형 유구 각 1기 및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송국리형 제1호 집터는 지름 580∼620㎝로 2차에 걸쳐 사용된 집터로 확인되었다. 1차 사용 때에는 중앙의 타원형 구덩이와 소형의 불땐 자리[爐址]를 갖추었다. 2차 사용 때에는 4개의 기둥구멍을 갖추었으며 중앙의 타원형 구덩이에 불땐 흔적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제3호 집터는 지름 730∼770㎝이며 4주공인데 기둥구멍 2개씩을 갖춘 세장한 타원형 구덩이 3개가 일렬로 배치된 점이 독특하다. 제6호 집터는 지름 670∼730㎝로 기둥구멍 4개를 갖춘 큰 움집터이며 기둥구멍 2개가 있는 타원형 구덩이(140㎝×50㎝)를 갖추었다.
유물은 ‘송국리식 토기’와 바리 등의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반달돌칼조각, 돌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집터구조와 출토유물로 본 연대는 서기전 5∼4세기대로 추정된다.
원삼국시대의 유구는 경작 등에 의해 많이 파손되었으나 장방형과 부정형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장방형 유구는 340㎝×260㎝의 소형이며 깊이는 30∼44㎝ 정도이다. 청동기시대 집터 일부를 파괴하고 만들어진 이 유구는 내부에 불에 탄 흙과 숯이 흩어져 있었다. 유물은 쇠도끼 · 쇠창 · 쇠손칼과 숫돌 등이 출토되어 작업시설로 생각된다.
원삼국시대의 유물로는 타날문토기편(打捺文土器片)과 큰 독, 활석제 추, 숫돌, 요석(凹石) 등이 있다. 큰 독은 목에 삼각형 거치문이 있는 회갈색토기로 아가리는 거의 수평으로 바라졌고 몸통에는 문살무늬가 베풀어져 있으며 밑바닥에 지름 5.5㎝, 높이 2.4㎝의 둥근 꼭지가 달려 있다. 이들 원삼국시대 유구와 유물은 2∼3세기대로 추정된다.
‘송국리형 집터’는 중앙부에 작업공(作業孔)으로 추정되는 타원형 구덩이의 존재 및 화덕[爐址]이 없다는 점을 특징으로 삼아왔었다. 그러나 한성리 제1·4호 집터에서는 장타원형 구덩이에 불을 피운 흔적이 확인되었고, 제1호 집터의 2차 사용 때에는 중앙의 타원형 구덩이에서도 불을 피운 흔적이 있었다.
이는 청동기시대의 ‘송국리형 집터’ 연구에 새로운 자료가 추가된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아울러 제1·3·6호 집터는 4기둥구멍을 갖춘 큰 움집터로 ‘송국리형 집터’의 발달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삼국시대의 유구와 문화층은 극히 일부만 확인되었지만 충남 서해안지역은 물론 한반도 중서남부지역의 원삼국시대의 문화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990년대에 들어와 서천 오석리 · 당정리 · 선도리와 보령 관산리 · 관창리 등의 유적에서 대규모의 마을 유적이나 ‘송국리형 집터’를 비롯해 돌널무덤 · 널무덤 · 주구묘(周溝墓) 등 청동기시대의 문화상과 원삼국시대의 유적과 유물 등이 확인되었다.
앞으로 한성리 유적 일대에 대한 연차적이고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면 전체 마을 유적의 규모와 각 유구간의 관계 및 성격 등이 정확히 파악될 것이다. 나아가 주변지역 유적과 더불어 한반도 중서부 지방의 청동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문화를 체계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