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용석(用錫), 호는 아호(丫湖). 신윤형(辛尹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보상(辛輔商)이고, 아버지는 부제학 신응시(辛應時)이며, 어머니는 정기(丁琦)의 딸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84년(선조 1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예문관 등에서 여러 벼슬을 지낸 뒤 1591년(선조 24) 병조좌랑으로서 진주사(陳奏使) 한응인(韓應寅)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평이 되어 왕을 호종, 평양에 가서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왜란 후 강릉부사·사간을 거쳐 이조참의·성주목사·충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하고, 다시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그러나 1612년(광해군 4) 사돈인 황혁(黃赫)이 이이첨(李爾瞻)의 음모에 걸려 화를 입게 되자 파직되었다. 다시 등용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신경진은 문무재(文武才)를 겸비하여 명성이 높았고,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신응시·신경진 부자의 시문집인 『백록유고(白麓遺稿)』가 전한다. 이재(李縡)가 신도비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