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2.1m.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릉의 비로서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을 뿐 비신은 소실되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이 비는 무열왕이 승하한 661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碑文)은 김인문(金仁問)이 썼다고 하나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비의 아래에는 귀부를 놓고 위에는 이수를 얹은 형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 비의 조각수법은 독창적이다. 귀부의 머리는 거북모양으로 목은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고 있어 전체는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과감한 기상을 보여주면서도 표정은 과격하지 않고 오히려 명랑하다. 비좌(碑座)는 연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귀갑은 4중의 육각형 귀갑문이 조각적인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이수는 좌우 3마리씩 놓여 있는 용이 서로 상대방의 앞발을 꼬리로 꼬아 전체는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있는데, 다리의 표현, 용의 비늘 하나 하나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귀부와 이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은 각자 생기가 있으면서도 전체와 조화되어 있으며 완전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귀부의 머리나 귀갑의 외형, 이수 등 그들의 윤곽은 완만한 곡선으로 단순화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탄력성 있는 양감(量感)을 지니고 있어서 당시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충만한 조각성과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조각들이 보여주는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신라 말기가 되면 귀부·비신·이수 셋으로 이루어지는 전체 형식은 변하지 않으나, 귀부와 이수, 각각의 조각양식은 격동적이고 율동적인 모습으로 변천한다. 말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를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