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선조 21)에 한호겸(韓好謙)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제자가 신안사(新安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69년(현종 10)에 중건하였으며, 1788년(정조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송경원(宋慶元) · 한필성(韓必聖) · 한명유(韓鳴愈) · 강백진(康伯珍) · 송시태(宋時態)를 추가 배향(配享:학덕 있는 사람의 神主를 모시는 것)하였다.
1819년(순조 19)에는 함평의 자양서원(紫陽書院)에 안치된 주희(朱熹)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주벽(主壁)으로 봉안함과 동시에 ‘신안(新安)’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52년(철종 3)에 이서(李舒)를, 1860년에 김수(金洙)를 추가 배향하였다.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주희의 영정 1본과 모사본 1본은 용담(龍潭)의 삼천서원(三川書院)으로 옮기고, 김수의 영정은 서울 본가로 보냈으며, 서원의 전답 6마지기는 매각 처분하여 임실향교로 귀속시켰다.
그 뒤 1901년 유림에 의하여 유허지에 제단을 마련하고 향사(享祀:제사)를 계속해오다가 1958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3칸의 동재(東齋), 4칸의 고사(雇舍), 창고, 대문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주희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동서 양쪽에 각각 4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강당의 중앙에는 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협실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쓰였다. 동재는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고사는 서원 관리자의 사택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봄 · 가을로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제사에 쓰는 음식)은 4변(籩) 4두(豆)이다. 1984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유물로는 《당옹실기 戇翁實記》 1책 등 10여 종의 문헌이 있다. 재산으로는 대지 160평, 전답 3,900여 평, 임야 600여 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