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량 장군 정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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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흥 신여량장군 정려 정측면
고흥 신여량장군 정려 정측면
조선시대사
유적
국가유산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에 있는 조선후기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신여량 관련 정려각. 사우.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신여량장군정려(申汝樑將軍旌閭)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지정기관
전라남도
종목
전라남도 시도기념물(1987년 06월 01일 지정)
소재지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동안길 64-2 (마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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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에 있는 조선후기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신여량 관련 정려각. 사우.
개설

1753년(영조 29) 임진왜란 때 순절한 신여량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려각으로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에 위치한다. 1987년 6월 1일에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고흥신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내용

신여량(申汝樑, 1564~1593)은 본관이 고령(高靈)이며, 고흥 동강에서 신홍해(申弘海)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의주병마절제도위(義州兵馬節制都尉)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扈從)하였고 노량과 한산대첩, 권율의 부장으로 행주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창의하여 순천 예교(曳橋) 전투에 참여하였다. 당포해전에서도 공을 세워 1604년(선조 37)에 승첩도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1605년 12월에 전라우수사로 임명 받았으며, 1606년 사망하였다.

1691년(숙종 17) 흥양 유학 신숙(申淑) 등이 공적의 포상을 바라는 상서를 관찰사에게 올렸고, 1735년(영조 11) 창평 유학 고만령(高萬齡) 외 13인, 1738년(영조 14) 전주 유학 김유성(金有聲) 외 73인이 통문을 올렸다. 그 결과 1753년(영조 29)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충신 정려가 내려져 치제하였다.

이 정려각은 1838년(헌종 4), 1937년, 1955년 등 몇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정려각은 단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주변에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일각대문을 설치했다. 주변에는 1990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임난순국공신 신여량장군정려중수기(壬亂殉國功臣申汝樑將軍旌閭重修記)가 있는데, 후손 신의식(申義植)이 짓고, 후손 신계태(申桂太)가 쓴 것이다.

그와 관련된 유물로는 주사선연도(舟師宣宴圖, 1601년경), 당포앞바다승첩도(唐浦前洋勝捷之圖, 1604), 교서(敎書, 1604), 유서(諭書, 1605) 등이 전해지는데, 1987년 6월 1일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일괄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문화재도록』도지정문화재편(전라남도, 1992)
『고흥군의 문화유적』(목포대박물관·전라남도·고흥군, 1991)
『신여량 장군 약사』(고흥군, 1976)
『봉헌실기(鳳軒實紀)』(고령신씨화수회, 1956)
국가유산청(www.kh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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