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은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 등을 연쇄적으로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전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후 처리문제에 대하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연합국의 전후 처리문제에 대한 합의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간의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 회담에서 3개국은 한국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정서에 합의했다. 2차대전 내내 연합국 간에 합의가 실패한 이유는 30년 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미국의 제안에 소련과 영국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신탁통치는 미국의 오래된 공식적인 전후처리 방침이었다. 필리핀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진 예에서 보이듯이 미국은 식민지였던 국가에 신탁통치를 실시하자는 입장이었지만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던 영국 등이 맹렬하게 반대하여 제대로 실시되지는 않았다. 한국에 대해서도 미국은 신탁통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미 1945년 10월 20일 미 국무부 극동국장이던 빈센트(John C. Vincent)에 의해 이러한 방침이 확인되어 국내에 보도되기도 했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미국의 제안을 수정한 새로운 안을 제출했고 이것에 미국이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련의 안은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앞세우고 임시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관계가 이러했음에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내용이 동아일보에 의해 한국에 최초로 보도된 내용은 소련의 주장에 의해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미국 태평양 사령부가 발간하던 태평양판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보도 내용을 전달해준 합동통신사의 뉴스기사를 이용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은 사실관계가 부정확한 오보에 가까운 것이었음에도 국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6년 1월 소련의 타스통신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 내용을 정확하게 상세하게 보도했지만 이미 벌어진 사태를 어쩔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즉각적으로 광범위한 반대운동을 촉발시켰다. 오랜 기간 동안의 식민지배에 막 벗어난 상황에서 또 다시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보도내용은 광범위한 대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신탁통치안이 보도된 1945년 12월 28일 김구와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들의 회합이 열리고 이튿날에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인 반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매우 강경한 태도로 반탁운동을 주도했는데, 조심스럽게 신탁통치에 찬성 입장을 표명했던 한국민주당의 송진우가 1945년 12월 30일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31일 신익희 내무부장 명의로 국자(國字) 1호와 2호 포고문을 발표하여 미군정의 모든 한인 관리와 경찰들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선포했다. 실제로 서울시내 다수의 경찰서장들이 김구와 임시정부를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이는 곧 당시의 통치권력이던 미군정을 부정하고 임시정부가 실질적 통치를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김구와 임시정부에 강력한 경고를 하기도 했다.
직접적인 권력 접수가 무위에 그친 후 김구와 임시정부는 이승만 세력과 연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만들고 이것이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약칭 민주의원)의 모체가 되었다.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김구와 임시정부였지만 그 성과로 나타난 민주의원 의장에는 이승만이 취임하였다. 한편 좌익세력은 대부분 동아일보 보도가 사실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달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타스 통신 등의 보도로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의 정확한 내용이 알려지자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내용에 대한 총체적 지지 입장을 표명하였다. 좌익세력은 이후로도 단정이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일관되게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에 근거한 미소공동위원회 성공과 임시 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반탁운동은 1945년 말과 1946년 1월 초에 걸쳐 진행된 이후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가 가시화되면서 다시 한 번 전개되었다. 그러나 2차 반탁운동은 그 강도와 규모에 있어서 1차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신탁통치 문제 자체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1945년 신탁통치반대운동은 해방정국 최대의 분수령 가운데 하나였다. 이 운동을 계기로 좌익세력과 우익세력 간의 대결 구도가 확고하게 형성되었고 이후 해방 공간의 정치구도를 기본적으로 결정지은 것이었다. 우익 세력이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한 다음 민주의원으로 연결되는 조직적 행보를 보였다면 좌익 세력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자신들만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좌우 대립 구도는 조직적 분립으로까지 연결되었다.
특히 이 운동을 계기로 좌익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우익세력이 확고한 자기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연합국의 승전에 따른 해방이라는 조건 하에서 연합국의 영향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무조건적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복잡한 국제정치적 맥락에 대응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노정되는 운동이었다. 결국 이 운동은 미국과 소련의 협조보다는 대립을 강화하는 성격이 짙었기에 한반도의 분단을 해결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던 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