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송운(松雲). 서울 출생. 능설(能卨)의 차남이다. 일찍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한성고등보통학교 사범부를 나와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또한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조선어연구회(현재 한글학회) 등에 참여하여 평생을 한글연구에 바쳤다.
한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모교인 교동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어서 경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로 옮겼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조직되자 이 모임에 가입하여 학회를 통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1927년 조선어연구회의 기관지 ≪한글≫ 창간에 참여하고, 1928년에는 조선광문회의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의 제1차조사위원으로 어휘조사와 문법연구에 전념하였다.
한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모교인 교동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어서 경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로 옮겼다. 1930년 경성여자사범학교 교유(敎諭)로 옮겼으며, 같은 해 조선총독부가 「언문철자법」을 공포하자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사이에 ‘중등조선어강좌’를 발표하다 중지당하고, 이어서 ‘개정 언문철자법강좌’를 열었다.
1935년 조선음성학회에서 정인섭(鄭寅燮)·이종태(李鍾泰)와 더불어 아동감독과 독서지도를 담당하였다. 1936년에는 여러 해 동안 연구, 조사, 정리한 문법자료를 모아 ≪중등학교 조선어문법 전(全)≫(조선어연구회)을 펴내어 문법교과서로서 널리 영향을 끼쳤으며, 또 ≪사범교육 조선어대화≫(조선어연구회)도 펴냈다.
1941년에 그 동안 일제가 언어동화정책으로 조선어과를 배제하자 한문을 가르치다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퇴임하고,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경성 화산국민학교(華山國民學校) 교유로 근무하였으며, 1946년에 다시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에 복직되었다.
1948년 동교 교우회지 ≪부중≫에 <국어에 대한 나의 신념>이라는 소론을 썼으며, 또 국어교육연구회 회지 ≪국어교육≫ 창간호에 <음성언어의 교육>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발음지도·어법지도·어투지도·언어용례지도의 중요성을 인격적 언어교육과 관련지어 언급하였다.
1949년에는 ≪음성언어교육≫(서울대학교사범대학 출판부)을 펴내기도 하였다. 1950년 6·25를 맞아 7월에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를 의원면직하였으며, 수복한 뒤 6·25 때 좌경학생을 도왔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수감중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