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루·2루·3루·본루의 네 베이스를 사용하므로 이 경기를 일컬어 베이스볼(base ball)이라 한다.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이탈리아·필리핀·대만 및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성행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역사가 길어 오늘에 와서는 프로야구까지 출범한 인기종목의 하나가 되었다.
달리기·뛰기·던지기 등의 기본적인 운동 외에도 때리기와 잡기가 가미되어 박진감과 흥미가 풍부하고, 상대팀과 복이합(複離合)이 이루어져 상황에 따른 협동성·판단력·결단력 등이 필요하다. 야구는 일반적으로 경식경기를 말하며, 일본에서 창안한 연식경기나 소프트볼(soft ball) 등은 레크리에이션 스포츠로서의 특징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야구의 기원에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미국 기원으로, 1839년 더블데이(Doubleday,A.)가 미국 어린이들의 원 올드 캣(one old cat) 놀이를 바탕으로 창안, 베이스볼이라는 이름을 붙여 근대야구의 효시가 되었다고 보는 설이다.
또 하나는 영국기원론으로, 13세기경 영국에서 시작한 크리켓(cricket)이라는 놀이가 라운더즈(rounders)로 되고 이것이 발달하여 야구가 되었다는 설이다. 라운더즈는 던져준 공을 방망이로 친 다음 베이스로 달리는 것으로, 뒤에 미국으로 전해져 야구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오늘날과 거의 비슷한 경기로 발전시킨 사람은 카트라이트(Cartwright,A.)로, 1845년 뉴욕에서 세계 최초의 야구팀인 니커보커야구협회를 조직하여 다이아몬드형 경기장을 고안하여 경기 인원을 9명으로 하였고, 3스트라이크가 1아웃이 된다는 등의 근대야구의 규칙을 공식화하였다.
① 경기장 및 용구: 경기장은 외야와 내야로 구분한다. 본루에서 38.795m 떨어진 곳에 2루가 있고, 본루와 2루를 기준으로 하여 27.432m 떨어진 양쪽에 1루와 3루가 있다. 본루에서 외야 양끝까지는 121.92m 이상이 되어야 이상적이다. 파울라인을 포함한 내야·외야는 페어그라운드이고, 그 밖의 지역은 파울그라운드이다.
투수판에서 본루까지의 거리는 18.44m, 본루에서 18.288m 뒤에 백 네트를 설치하고 각 루에는 베이스가 설치된다. 경기에 필요한 용구로는 공·배트·글러브·보호용구 등이 있다. 공은 코르크·고무 등에 실을 감아 두겹의 소나 말의 가죽으로 싸서 만든 것으로 무게는 141.8∼148.8g, 둘레는 22.9∼23.5㎝이다.
연식용의 공은 고무로 만든 것으로 L·B·A·C의 네 종류가 있다. 배트는 목재와 알루미늄재가 쓰이고, 길이는 106.6㎝(42인치) 이하, 둘레는 가장 굵은 부분의 지름이 6.98㎝(2.75인치) 이하로 되어 있다. 글러브는 야수용 글러브와 포수용 미트, 1루수용 퍼스트미트가 있다.
글러브는 모두 가죽으로 만들며 속에는 판야(panja)가 채워져 있다. 보호용구는 포수 또는 주심이 얼굴에 쓰는 마스크(mask), 정강이 보호를 위한 레그 가드(leg guards), 가슴을 보호하는 프로텍터(protecter) 등이 있다.
② 경기의 전개 및 특성: 양 팀이 공격과 수비를 교대하면서 공격팀은 타순에 따라 수비측의 투수가 던진 공을 치고 주자가 되어 3개의 누를 경유, 본루에 홈인(home in)하면 1점을 얻게 된다. 타자는 3스트라이크(three strike, 三振)일 때 아웃(out)되며, 4볼(four ball)이 되면 1루로 진루한다.
공격 측은 세 명이 아웃될 때까지 공격을 계속하는데, 수비 측은 타자 또는 주자를 아웃시키는 작전을 해서 점수를 주지 않으려 한다. 공격과 수비를 마치면 1회가 되며, 정식 경기는 9회로 9회의 공격·수비를 끝낸 뒤 득점이 많고 적음에 의하여 승패를 가름한다.
야구경기에서 반칙행위는 공격하는 측에 의한 수비방해와 수비하는 측에 의한 공격방해가 있다. 수비방해 가운데는 타자나 주자가 수비하려는 야수나 볼에 대하여 몸이나 용구로 막거나 혼란을 일으키게 하려는 행위로, 방해의 당사자나 방해로 인하여 이익을 본 선수는 아웃선언을 당한다.
이와 반대로, 공격방해는 타자가 공을 치려고 하는 것을 방해한다던가 정당하게 베이스로 뛰고 있는 주자를 공과 직접 관계없는 야수가 방해하는 경우로, 타자를 1루에 진출하게 하고 주자의 경우에는 구심의 판단에 따라 진루를 시킨다.
심판은 구심과 1·2·3루의 누심 등 4명으로 구성되나, 야간경기의 경우에는 좌우선상에 선심을 한 사람씩 배치하는 때가 많다.
③ 경기기술: 야구의 기술은 크게 공격과 수비로 나누며, 기본적으로는 공을 주고(throwing), 받는 것(catching)과 공을 던지고(pitching), 치고(batting, hitting) 달리는(base runn-ing) 기술을 포함한다. 공격기술로는 타자가 되어 타석에 들어가 배트로 투수에 의해 투구된 볼을 선별해서 때리고 주자가 되어 진루해야 한다.
이 때 볼을 선별하는 기술과 볼을 날리거나 굴리고 떨어지는 구역을 원하는 곳에 안전하게 때리는 기술이 필요하다. 수비기술로서는 공격하는 쪽의 득점을 막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에 주자를 내보내지 않도록 전력을 다한다.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사람은 투수로서, 그 보조역인 포수 사이에서 타자가 치기 어려운 공을 던져야 할 뿐만 아니라, 공을 던지려는 자세가 주자를 통제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뛰어난 투수력은 수비력의 70∼80%를 차지한다고 한다.
내야수들은 수비면에서 공을 다루는데, 특히 누수와 유격수는 내야수비의 중심으로 공격기회를 무너뜨리고 민첩, 정확한 경기를 하여야 한다. 외야수는 넓은 지역을 지키고 동떨어진 각 베이스에 송구하기 때문에 발이 빠르고 어깨의 힘이 좋아야 한다.
포수를 제외한 수비선수들은 타구에 대비하여 페어 그라운드 위의 어느 곳에서 수비하여도 상관이 없다. 야구경기는 인간의 기본적인 운동능력 외에도 공과 배트와의 다양한 접촉에 의하여 나타나는 고도한 기술과 체력은 물론, 지능발달과 사회적 성격을 조성하고 정확, 기민한 활동과 협동정신, 왕성한 투지 등을 함양케 해 준다.
또한, 다채롭고 순간순간이 변화무쌍한 경기는 관람자로 하여금 흥분과 초조감을 자아내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야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애호하고 있다.
야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04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Gillett, 吉禮泰)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회원들에게 지도한 것이 그 시초이다. 당시에는 타구(打球)라 불렀으며, 1906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와 덕어학교(德語學校)가 경기를 하여 야구경기의 첫출발을 하였다.
1909년에는 동경유학생들과 선교사간에 경기가 개최되어 유학생팀이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 경기가 일대선풍을 일으켜 우승한 유학생팀이 평양·안악·철산 등을 순회하면서 야구를 지도하였다.
1910년대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한성외국어학교·동경유학생회·대한의원부속학교·한성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 등 여러 학교에 야구팀이 창설되었고, 1920년 7월 조선체육회가 창립되면서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개최되어 중학부에 경신·휘문·배재·중앙·보성 등 5개 팀과 청년부에 5개 팀이 출전하였는데, 여기서 배재고등보통학교가 전체 우승을 차지하였다.
1922년 12월에는 미국 메이저 리그의 프로야구단을 초청하여 철도구장(鐵道球場)에서 전조선군(全朝鮮軍)과 경기를 가져 21:3으로 대패하였으나, 미국 프로야구의 기술을 접하여 우리나라 야구계의 기술향상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1923년 5월 23일에는 윤치영(尹致暎)·이원용(李源容)·허성(許城)·이석찬(李錫贊)·유용탁(柳容鐸) 등의 발기로 조선야구협회가 창립되어 조직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우리나라 야구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1930년 9월 야구심판협회가 구성되어 야구계의 건전한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나, 1938년 우리나라 체육계의 총본산인 조선체육회가 일본인이 조직한 조선체육협회에 흡수되면서 점차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일전쟁 당시부터 일제의 노골적인 감시를 받아, ‘망국스포츠’라 일컬어지면서 활동이 금지되었던 야구는 광복과 함께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1945년 10월 식산은행구락부(殖産銀行俱樂部)의 주동으로 조선야구협회가 재조직되었고, 1946년 9월 휘문·배재·경신·중앙 등 4개팀이 서울운동장에서 리그부활전을 개최함으로써 야구의 발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1946년 청룡기중학야구선수권대회, 1947년 황금사자기대회, 1949년 화랑기대회가 각각 창설되었다. 1954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였고, 같은 해 11월 우리나라 야구협회가 국제야구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1954년부터 전국 군·실업야구쟁패전이, 1955년부터 전국야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1962년 9월 서울에서 실시된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 야구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고교야구의 인기가 대중 속에 깊숙히 파고들자 1967년 중앙일보사 주최 대통령배대회, 1971년 한국일보사 주최 봉황대기대회 등이 창설되어 고교야구의 열기를 드높였다.
당시 이러한 전국대회의 과다한 창설은 학생선수들의 면학을 저해하는 새로운 문제점을 야기시킴과 동시에, 야구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아마추어야구는 1963년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을 비롯하여 제9회(1971)·제11회(1975)에서 우승을 차지하였고, 1975년 니카라과대륙간컵대회(International Cup Competition)에서 5위를 하여 한 때 아시아권에서 벗어났다가 1977년 대회에서 정상을 차지, 우리나라 야구를 널리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1978년 이탈리아세계야구선수권대회(World Baseball Championship Series)에서 3위, 1980년 동경대회에서 준우승, 1982년 서울대회에서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아마추어야구 최강국의 하나로 부상하는 절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1982년 프로야구의 창설로 아마추어야구는일시적인 침체기를 맞게되었으나, 곧 회복되었다.
1983년 캐나다대륙간컵대회에서 5위를 하였고, 8년 만에 부활된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일본·대만과 함께 공동우승에 그쳤으나, 1986년과,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이어 1986년 오사카에서 개최된 아틀랜타올림픽기념 국제야구대회에서는 강적인 쿠바를 꺽고 결승에 진출하여 우승하였다.
1998년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제13회 아시아경기대회 야구 결승전에서 일본을 콜드게임으로 누르고 우승하였다. 이후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한국 야구의 수준을 세계정상급으로 끌어올렸다.
한편 1982년 프로야구의 창설은 아마추어야구의 숨통을 터주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야구는 스포츠활동을 통해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야구기술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단순한 스포츠행사에서 벗어나 사회전반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특수산업으로 발돋움하여, 화제가 빈곤하였던 국민들에게 건전한 오락을 제공함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선수들이 좋은 대우 속에서 보다 높은 기술을 습득하게끔 자극을 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