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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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청과 벌 /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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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벌꿀 · 밀랍 · 꽃가루 · 프로폴리스 · 로열젤리 등을 얻기 위하여 꿀벌을 치는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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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벌꿀 · 밀랍 · 꽃가루 · 프로폴리스 · 로열젤리 등을 얻기 위하여 꿀벌을 치는 농업.
내용

우리나라 양봉의 기원이 기록상으로는 고구려 동명성왕 때 재래종벌인 동양종꿀벌(Apis cerana)이 원산지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수렵과 함께 자연에서 열매를 채취하여 먹이를 해결하면서 바위 틈이나 큰 나무의 구멍에서 달고 진한 꿀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생활이 농경생활로 접어들어감에 따라 정착영농의 시대로 발전하고, 이 때부터 사유재산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자연발생적인 꿀벌의 소유가 양봉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같은 연유로 우리나라 양봉의 기원은 자생적일 가능성이 높다. 문헌상으로 가장 괄목할 만한 기록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 양봉기술이 꿀벌과 함께 일본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즉, 643년(의자왕 3)에 백제의 태자 풍(豊)이 꿀벌 4통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양봉 기술을 일본에 전해준 것이다. 그 뒤 발해와 일본과의 교역에서 꿀을 주요 수출품으로 기록한 것은 우리나라 양봉이 계속 발전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꿀의 용도가 다양화되어 유밀과(油蜜果)를 만들어 먹을 정도였다. 이 시대에는 사봉(寺蜂)이라 하여 절에서 양봉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왕조가 태평성대를 누릴 즈음에는 꿀의 소비량이 많아졌으나 공급량이 모자라서 왕실주방용도 충당하기 어렵게 되자, 꿀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하여 1192년(명종 22)에는 궁중 외에는 대소반가(大小班家)와 사찰에서까지 유밀과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내렸다.

이와 같은 조처는 그 뒤 조선시대에도 꿀이 모자랄 때마다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에는 꿀이 진상품(進上品)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관찰사의 진상품 가운데 인제(麟蹄) 꿀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이 시대에는 각종 문헌에 양봉에 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1433년(세종 15)에 나온 『향약집성방』과 선조 때 나온 『동의보감』에는 벌꿀과 밀랍 뿐만 아니라 꿀벌의 애벌레(蜂子)까지도 영약(靈藥)으로 등장하고 있어 양봉업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찬팔도지리지 新撰八道地理志』나 이보다 100여 년 뒤인 중종 때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벌꿀의 산지에 관한 기록은 많지만, 양봉기술 등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실학파가 등장하면서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숙종 때 홍만선(洪萬選)이 지은 『산림경제』에 비로소 양봉기술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즉, 벌을 보호하는 방법[護蜂法], 꿀을 따는 방법[割蜜法]이라든가 월동할 때 꿀을 과다하게 따내면 벌들이 굶어 죽게 된다는 등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때부터 사대부층에서 양봉기술의 보급에 나서게 되었으며, 꿀벌기르기와 채밀방법을 지도할 수 있는 양봉기술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홍만선의 『산림경제』 이후 많은 저술 활동과 함께 양봉업의 발달을 짐작할 수 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순한글로 된 『규합총서(閨閤叢書)』를 들 수 있다.

이 책에는 벌꿀을 이용한 여러 가지 음식 만드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벌꿀의 수요층이 많이 늘어난 만큼 양봉이 일반화되었음을 증명하는 자료인 것이다. 이 시대의 꿀벌은 모두 동양종이었고 채밀방법을 비롯한 양봉기술은 원시적이었으며, 번식마저 저조하였다.

벌집을 쥐어짜서 걸러낸 것을 생청(生淸), 밀폐된 방에 군불을 때어 꿀이 흘러내리도록 하여 걸러낸 것을 화청(火淸)이라 하였는데, 두 가지 모두 벌집을 파괴하는 방법이므로 생산과 번식이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적 의미의 양봉은 한말 독일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개량종벌이 도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비로소 가동식 소광을 넣을 수 있는 오늘날과 같은 벌통, 소초(巢礎), 원심분리기에 의한 채밀방법 등 근대양봉의 3대 요소가 소개된 것이다. 그 뒤 개량종벌은 이탈리안종·카니올란종 등이 계속 도입되었으나 현재는 이탈리안종 및 코카시안종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1914년에는 양봉농가 호수, 벌꿀과 밀랍의 생산량, 꿀벌 사양방법, 벌꿀과 밀랍의 용도 및 수급상황, 양봉장려대책 등을 종합한 실태보고서를 겸한 지침서로 『양봉조사(養蜂調査)』가 발행되었다.

1917년에는 윤신영(尹愼榮)에 의해 개량종 꿀벌의 양봉지침서인 『실험양봉(實驗養蜂)』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국한문 혼용인데 그 뒤 오랫동안 양봉가들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30년대를 양봉의 황금기라고 일컫는데 이때부터 벌꿀의 용도도 다양화되었고 수요층도 일반 서민층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제약용으로 수요가 크게 늘어나 당시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였던 천일약방(天一藥房)은 ‘영신환’의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양봉사업부를 설치하고 전국 산천을 옮겨다니며 양봉을 하였다.

1950년대의 양봉업은 남부지방의 유채·자운영·아카시아와 중부 산악지방의 싸리·메밀 등을 주밀원으로 서서히 재기를 시작하여 1960년대에는 전쟁전의 수준을 넘어 성장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는 벌꿀과 밀랍생산 일변도에서 벗어나 로얄젤리를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 말에 꽃가루를, 1985년 이후에는 봉독(蜂毒)으로 생산영역을 넓혀나갔다. 1928년 우리나라에서 사양된 총 봉군수(蜂群數)는 17만여 군인데 그 중 동양종이 84% 이상이었다.

1935년에는 총 봉군이 20여 만 군으로 동양종은 82% 정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1955년의 경우를 보면 전체 봉군수가 크게 감소하였으며, 7만여 군 중 75%는 동양종인데 10년 후 1965년의 경우는 12만여 군인데 점차 동양종의 비율이 감소하여 59% 정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1980년 말에는 100군 이상을 사양하는 양봉농가는 전국적으로 3,000호를 넘어서게 되었고, 부업양봉까지 합하면 4만여 호의 양봉농가에 총 보유봉군수는 40만 군에 육박하게 되었다. 또한 1987년에는 4만 8000여 호의 양봉농가에 총 보유봉군수는 53만여 군이고, 그 중 재래종은 10만여 군이었다.

1960년대 중반, 남부지방에 처음으로 발생한 꿀벌응애와 1984년의 석고병(초크병) 등이 전국으로 만연되어 사양된 봉군의 약 40%가 피해를 받게 되었으며 1992년에는 급기야 서양종 꿀벌이 29만여 봉군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1993년 중국에서 꿀벌이 수입되는 과정에서는 중국가시응애가 유입되어 전국 규모로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양봉농가의 70%가 경제적 손실을 본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다.

농촌의 고소득 작물인 딸기·참외·토마토·고추 등은 시설재배 면적이 해마다 늘어 이들 작물의 화분매개용으로 꿀벌의 수요가 급증하였지만 국내 사양되고 있던 꿀벌의 봉군수가 부족하여 이를 채울 수 없었으며 결국 1991년 이후 매년 외국에서 꿀벌을 수입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최근 4년간(1995∼1998) 우리나라가 외국에 지불한 벌 값은 693만 불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 양봉산업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 꿀 생산량이 연간 8,000톤 내외에 이르고 그 밖에 화분, 로얄제리 등까지 포함하면 모두 1000억 원 규모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양봉산업의 경제성은 위와 같은 양봉산물 생산에 의한 이익보다는 꿀벌이 식물(산림과 농작물)의 화분매개를 원만하게 도와주어 얻게 되는 이익이 100배 이상 되므로 해마다 작물의 화분매개를 통해 약 10조 원이 넘는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양봉은 꿀벌을 활용하여 각종 꽃으로부터 꿀과 꽃가루를 수집함으로써 산지자원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는 산업이다.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는 꿀벌의 사양에 적합하므로 꿀벌의 품종개량과 고품질산물생산, 밀원식물의 계획적인 조림, 농작물의 계획수분 등 각종의 정책적인 지원책이 「꿀벌법」 또는 「양봉진흥법」을 통해 수립된다면 그 전망은 매우 밝을 것이다.

참고문헌

『산림경제(山林經濟)』
『규합총서(閨閤叢書)』
『실험양봉(實驗養蜂)』(윤신영, 중앙서관, 1917)
『최신 양봉경영』(서울대, 양봉과학연구소, 1998)
『한국양봉총람』(한국양봉협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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