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문자를 쓰거나 채연에 물감을 풀어 그림을 그릴 때 벼루에 적당한 양의 물을 떨어뜨려주어야 하는데, 그 목적을 위하여 고안된 그릇이다.
연적에는 구멍 둘을 내어 공기를 조절함으로써 연적 안에 물을 넣고 또 원하는 만큼의 물이 나오도록 조절할 수 있게 하였다.
삼국시대 이래 벼루를 써왔으므로 벼루에 물을 주기 위한 연적도 함께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희귀하게도 고구려의 도제(陶製) 거북연적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지식인 사이에 문방취미가 보급되면서 아름다운 청자연적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지금 전하고 있는 청자연적의 예로는 동자(童子)모양·도석인물(道釋人物)·원숭이·원숭이 모자형·오리모양 연적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오리모양 연적(국보, 1962년 지정)은 그 제작수법이 섬세하고 뛰어난 색택(色澤) 등 나무랄 데 없는 걸작품이다. 등에 연잎을 얹고 거기에 연봉마개가 된 물넣는 구멍을 내고, 또 하나의 연봉을 입에 물려 물이 나오게 하였으며, 꼬아진 연줄기로 약자를 연결해서 자연스럽게 연못에서 헤엄치는 오리를 연상하도록 하고 있다.
글을 숭상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연적 역시 그 형태가 다종다양하여지고 수효도 많아진다. 조선시대 연적은 조선 전반기에 분청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백자연적이다.
형태로는 원형·또아리형 및 4각·6각·7각·8각 등 다각형의 것과 보주형·무릎형, 복숭아·감·부채·집모양 및 동식물·조충류·산형(山形)·악기 등을 본뜬 상형(象形) 연적이 많고, 후기에 와서는 투각 등 기법이 가미되어 형태가 더 다양하게 되었다.
백자 위에 청화로 사군자 등 문양을 그려넣기도 하고 산수화를 그린 것도 있다. 조선시대 순백의 연적은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선비의 정신을 잘 나타내 주며, 산수화가 그려진 연적 등은 주로 후기에 한강변 분원(分院)에서 구워낸 것으로 작은 연적에 산수화를 그려넣어 탁자 위에 놓고 호연(浩然)한 세계를 보려 한 조선 선비들의 아취와 문기(文氣)를 엿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