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란 만주 지방에 살던 부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한국인들은 두만강 지역에 살던 여진족을 '오랑캐'라 불렀다. 넓은 의미로는 중화관(中華觀)에 의한 변방의 모든 민족, 즉 동남서북 사방의 오랑캐를 포괄하기도 한다. 「오랑캐 설화」에서는 '오낭구(五囊狗)'에서 ‘오낭개’, '오랑캐'가 되었다고 한다. 오랑캐의 한자 표기 '을량합(兀良合)'은 『고려사(高麗史)』의 「공양왕」에서 최초로 나타나고, '오랑캐'라는 한글 표기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처음 등장한다. '오랑캐'라는 단어는 단순히 '사람'이라는 의미로 원래는 비하의 뜻이 없었지만, 한반도에 유교의 성리학과 중화 사상이 유입되고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1637)을 겪으면서 여진족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이 깊어져 경멸, 비하의 의미가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반호 전설(盤瓠傳說)」로도 알려진 「견용국(犬用國) 시조 설화」는 중국 고신씨(高辛氏)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반호 전설」은 중국 기원의 동아시아 「광포 설화」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국 특유의 「오랑캐 설화」로 변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기열(成耆說)이 채록한 「오랑캐 설화」(1967년 경기도 양평군, 정달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재상이 얇은 껍질로 된 북을 만들어 이 북을 찢지 않고 소리를 내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 했으나, 북이 찢어질까 봐 아무도 치지를 못하였다. 하루는 북소리가 들려 가보니 개가 꼬리로 북을 치고 있었다. 재상은 할 수 없이 그 개를 딸과 혼인시켰다. 개가 밤마다 딸을 핥고 물고 할퀴자, 괴로움을 참다 못한 딸은 개의 네 발목과 입에 각기 주머니를 씌웠다. 그래서 이 개는 ‘오낭(五囊)을 낀 개[狗]’가 되고 말았다. 그 개와 딸이 자식을 낳자 북쪽으로 쫓겨나 후손을 퍼뜨렸다. 그 뒤 '오랑구'가 '오랑캐'로 변하여 북쪽에 사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개가 중국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고 설정한, 간도 지방 만주인들의 시조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자가 낮에는 개가 되고 밤에는 사람으로 변하는데, 남자가 사람으로 변하는 장면을 아내가 엿보게 되었다. 그 뒤부터는 영원히 개의 탈을 벗지 못하고, 머리 부분이 개로 남게 되었다."라는 내용이다. 그래서 지금의 만주인은 머리 위에 긴 머리를 남기어 선조의 형적(形迹)을 간직한다고 하면서 장발(長髮)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올량합(兀良合) 시조 설화」에서는 불알이 다섯 개 달렸다는 오랑견(五閔犬)이 두만강 가에 빨래하러 나온 처녀를 범하여 머리털이 누런 자식을 낳았는데, 그가 북쪽으로 가서 시조가 되고, 그 후손을 '오랑견'에서 '오랑캐'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단군 신화(檀君神話)」 · 「견훤 전설(甄萱傳說)」 등의 이류 교혼담(異類交婚談)과 마찬가지로, 이 설화도 원래는 북쪽 사람들이 자기 집단의 신성성(神聖性)과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개와 사람의 이류 교혼에 의한 시조의 출생담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설화가 우리나라에 수용된 후 '을량합'을 '오랑캐'로 읽게 되면서, '오랑구'라는 유음어(類音語)를 만들어 내면서 이 설화가 형성 · 전승되었을 것이다. 여러 대에 걸쳐 침입을 일삼던 북방 여진족에 대한 혐오감 · 적대감 · 멸시감 등과 더불어 자국민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가미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