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 서 · 북쪽은 화성시, 남쪽은 평택시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59′∼ 127°06′, 북위 37°07′∼ 37°11′에 위치한다. 면적은 42.76㎢이고, 인구는 20만 6828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6개 행정동(32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경기도 오산시 오산동에 있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하며 2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가 발달하고 있다.
북부 지방에는 양산봉(陽山峰) · 여계산(女鷄山, 161m) · 노적봉(露積峰, 160m) · 반월봉(118m) 등이 있으나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침식저지대를 이루고 있다.
시의 동쪽에서 발원하는 오산천(五山川)은 서쪽에 있는 기장천과 합류하고 서남진하면서 황해로 흐르고, 북부 경계에는 상미천이 서류하여 황구지천과 합류하는데 황구지천(黃口池川)은 서북부경계를 지나면서 남류하여 진위천(振威川)으로 들어와 아산호로 흘러간다.
이들 하천 유역에는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하천은 하상이 높은 천정천이기 때문에 매년 홍수 시에 범람하여 자연제방과 배후습지를 발달시키고 있다. 그러나 하천유역에 제방을 쌓고 수로의 직강공사(直江工事)를 하고 배수시설을 갖추면서 현재 이들 습지는 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지질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결정편마암이 부분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토양은 구릉지대에는 적황색토와 암색토가 분포하며 저지대에는 회색토와 충적토가 분포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1.0°C, 1월 평균기온 -3.6°C, 8월 평균기온 24.9°C이며, 연강수량은 1,200㎜ 내외이다.
이 시와 인접한 화성시 동탄면 · 양감면 · 팔탄면 등지에서 돌칼 · 철촉 · 토기 등 철기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금암동에서 30기가 넘는 지석묘군이, 수청동 · 외삼미동에서도 지석묘가 발견되어 이미 신석기시대에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내삼미동의 필봉을 비롯하여 금암동 · 궐동 · 가수동 등 여러 곳에서 현재까지도 거행되는 산신제의 유습으로 이 사실을 증명해주기도 한다. 삼한시대에 마한 54개국 중의 하나였던 모수국(牟水國)은 그 위치가 수원일대였다고 했으므로, 오산시도 예로부터 이에 속해서 내려온 것이다.
고구려 때는 매홀군(買忽郡)이라 불렸으며, 백제와의 분쟁지역이기도 한 이곳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9주가 설치되고 그것이 개명될 때 수성군(水城郡)이라 칭해지고 이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남정할 때 수성군에서는 고을사람인 김칠(金七) · 최승규(崔承珪) 등 200여 명이 귀순하여, 그 공으로 934년(태조 17)에 수주(水州)로 승격시켰다. 995년(성종 14)에는 도단련사(都團練使)를 설치되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되었다. 이 때 고을의 별칭이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018년(현종 9) 다시 수주로 승격되어 지수주사(知水州事)가 설치되면서 동시에 정송(貞松) · 용성(龍城) · 광덕(廣德) · 쌍부(雙阜) 등의 현이 영속되었다.
1271년(원종 12)에 몽고병이 대부도에 침입했을 때 주민들이 몽고병을 죽이고 부사 안열(安悅)이 평정시켰다 하여 그 공으로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 홍건적이 들어왔을 때 고을사람들이 항복하여 군으로 강등되었으나 그 뒤 군민들이 재상 김용(金鏞)을 움직여 다시 부로 복구되었다.
1394년(태조 3)에 단행된 조선의 한양 천도로 양광도에서 그 이듬해 경기도에 편입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로, 1456년(세조 2)에는 판관이 두어져 진으로 되었고, 경사(京師) 수호의 보(輔)의 한 곳이 되었다. 1526년(중종 21)에는 고을에서 부모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 군으로 강등되었고, 그 뒤 인천에 속하기도 하였으나 1535년 다시 복구되었다.
1793년(정조 17)에는 수원부가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고 정약용(丁若鏞)의 창안에 의한 기중기와 녹로 등이 사용되어 각종 시설을 갖춘 화성(華城)이 축조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祖)를 1789년에 양주 배봉산(拜峰山: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1)에서 수원의 화산(花山: 지금의 화성시 송산동)으로 천장하고, 이곳에 있던 수원부 읍치를 현재의 팔달산 밑으로 옮겼다.
옛날에는 서해에서 오산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오산(鰲山)이라 불렸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선 중기에는 오미장(梧美場)으로 불리거나 다른 지방보다 까마귀가 유난히 많다고 하여 오산(烏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1895년(고종 32)에 근대식 행정제도로서 지방제도가 개정되어, 대한 23부의 하나인 수원군으로 개칭되면서 일시 인천부 관할로 된 적이 있었으나 그 이듬해 다시 경기도 수원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같은 해에는 수원군이 경기도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으며, 1910년 경술국치 후 서울로 이전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이 수원군에 통폐합되었다. 이 때 오산시 일대에는 청호면(淸湖面)의 7개 리와 산성면(山城面)의 5개 리, 초평면(楚坪面)의 14개 리, 문시면(文市面)의 8개 리가 있었으나, 1914년 부군면이 통폐합되면서 조정하여 산성의 ‘성(城)’자와 청호의 ‘호(湖)’자를 따서 성호면(城湖面)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일원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수원군의 여타 지역은 화성군이 되고, 이곳은 화성군 오산면이 되었으며 2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60년 1월 1일 면세가 확장됨에 따라 오산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70년 6월 10일화성군청사가 수원에서 오산읍으로 이전되었다. 1989년 1월 1일오산읍이 시로 승격되어 화성군에서 독립, 분리되었으며 1995년 4월 20일에는 평택군 진위면의 고현리 · 청호리 및 갈곶리 일부가 이 시에 편입되었다.
금암동의 오산 금암리 지석묘군(경기도 기념물, 1988년 지정)에서 30기 이상의 지석묘가 발견된 데 이어 수청동지석묘와 오산 외삼미동 고인돌(경기도 기념물, 2005년 지정)도 있다.
관방유적으로 지곶동에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짐작되는 독산성 및 세마대지(사적, 1964년 지정)가 있다.
주요 사찰로는 독산성을 축성한 뒤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보적사(寶積寺, 일명 洗馬寺)를 비롯하여 수청동의 선불사 · 반야암 등이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1792년(정조 16)에 건립된 오산시 궐리사(경기도 기념물, 1994년 지정)가 있는데, 창건 당시 어서사액(御書賜額)되었으며 공자를 봉사(奉祀)하여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또한, 이 궐리사에는 1904년에 도약장(都約長) 조병식(趙秉式) 외 7인이 중국 산둥성에 있는 「성적도(聖蹟圖)」를 본떠 제작한 「궐리사성적도」가 보관되어 있다. 궐리사성적도는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서동에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향해 진군하던 중 전사한 충신 이상재(李尙載)의 정려각이, 가수동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왕조를 건국할 때 일등공신이었던 이지란(李之蘭)의 사당이 있다.
외삼미동과 내삼미동 사이에는 6·25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군 제24사단 소속 스미스 전투부대 장병들이 공산침략군과의 최초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55년에 건립한 유엔군초전기념비(UN軍初戰紀念碑)가 있고, 수청동에는 충혼탑이 있다.
보호수로는 수령 200년이 넘는 궐리사내의 은행나무, 수령 약 400년 된 벌음동의 팽나무, 수령 약 200년 된 지곶동의 홰나무(회화나무) 등이 있다.
이 지역의 최초 교육기관은 1305년(충렬왕 31)수원의 옛 읍치였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세워진 수원향교이다. 정조가 1789년(정조 13)화산 밑에 있던 원래의 읍치를 현재의 팔달산 일대로 옮길 때 이 향교도 화성부내로 이축되었다. 그러므로 같은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 관할로 내려오던 오산도 이 영향 밑에 있었다.
또한, 공서린이 궐동에 현재의 궐리사를 세우고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개강하여 많은 유생들을 교육시켜 인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신교육기관으로는 당시 같은 구역이었던 수원군 관내에 남양공립보통학교가 처음 설립된 데 이어 1913년오산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되어 1941년에 명칭이 성호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1923년 사립 삼미의숙(三美義塾)이 개교하여 1945년에 삼미초등학교로 되었고, 1925년사립광성학원이 개원하여 1949년에 공립인 광성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그 뒤 오산 · 화성 · 성산 등의 국민학교가 광복 후에 개교되었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48년에 성호고등공민학교(城湖高等公民學校)가 개교되어 1952년에 오산중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54년에 오산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청학동에 오산공업전문대학, 양산동에 한국신학대학 등이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2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8개교, 특수학교 1개교, 오산대학교와 한신대학교가 있다.
1964년에 개원한 화성문화원은 현재 오산시와 화성군 전역의 문화활동을 관할하고 있으면서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며 전통적인 향토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있다.
그 밖에 한국문인협회 화성지부가 1988년에 창립되어 향토사회의 문학발전과 창작활동에 기여하고 있으며, 매흘어머니회는 문학을 비롯한 기타 문화부문에, 화성미술인회는 미술창작발전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에는 두레놀이 · 씨름 · 줄다리기 · 윷놀이 · 널뛰기 등이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놀이로는 윷놀이를 꼽을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시민들의 행사로서 척사대회(擲柶大會)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 대회는 오산 쌀시장 광장에서 음력 정월 8일부터 시작되어 14일까지 펼쳐지며, 참가자는 관내의 거주자에 한한다.
참가자가 근 2,000여 명에 달하기 때문에 사방 1.5m의 깔개를 깐 윷판이 여러 군데 설치되고, 두 짝이 낙판하게 되면 무효로 하는 등 엄격한 규정으로 우승자를 가린다.
윷짝은 작고 둥근 나무토막을 반으로 쪼개서 쓰는데, 대개 밤나무를 사용하며 넓적하게 하여 잘 구르지 않게 하는 것이 특색이다. 윷짝은 원래 굵기 때문에 두 짝씩 엇갈리게 쥐고 한 개는 높이 올려 노는 것을 쳐주고 있다.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송아지 한 마리를 주며 준우승자에게는 백미 한 가마를 준다. 대회 동안에는 농악놀이가 펼쳐져 흥을 돋우고 동네 부녀자들도 함께 나와 막걸리를 대접하는 등 동민들의 단합과 친목을 다진다. 또한, 행사 후에는 경로효친사상을 일깨워주기 위해 동네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푼다.
대나뭇골과 소나뭇골, 오동나뭇골이 각각 경치가 좋다 하여 정조가 삼미(三美)라 이름을 지었다는 내삼미동에서는 매년 음력 9월 30일 밤 9시를 기해 필봉(筆峰)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유래가 오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산신제는 산 중턱에 있는 고목이 된 소나무와 참나무숲을 신체(神體)로 삼고 있는데, 이곳에서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고 조라(산신제나 용왕제 등에 쓰는 술)와 정화수를 떠놓고 엄격한 관례에 따라 산신제를 지낸다.
제관과 집사 그리고 축관은 제일 7일 전에 선출하는 것이 보통이며, 선출된 제관들은 제일까지 목욕재계하고 근신해야 한다. 산신제가 행해지는 동안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네 출입을 금하여 부정한 일이 없도록 특별히 규제를 하며, 제가 끝난 뒤에도 음식을 차려서 먹거나 농악을 곁들여 노는 일은 없다.
이 밖에도 금암동 · 세교동 · 지곶동 · 가장동 · 가수동 · 궐동에서 산신제 · 당제 · 정제 등이 9월 30일경에 행해진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독산성과 세마대」 · 「방아못과 부처재」 등의 지명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지곶동에는 독산성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백제시대에 쌓았던 성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권율(權慄) 장군이 서진하는 왜적을 쳐 진로를 막은 곳으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권율은 명군(明軍)과 호응, 서울수복을 위해 2만여 명의 군사로 수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곳은 군사기지로는 중요한 위치였지만 물이 없어 주둔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왜장 가토(加藤淸正)는 산상에 물이 없을 것을 짐작하고 이를 탐지하기 위해 첩자를 시켜 물 한 지게를 산상에 올려보냈다. 이를 눈치 챈 권율은 성 안 서장대에 장막을 치고 잔치를 열면서 군마를 끌어내어 흰쌀을 말에 끼얹으며 말을 씻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지켜본 왜적은 성내에 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서둘러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성안의 서장대를 세마대라 부르게 되었다.
화성군 정남면 귀래리에서 오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부처재에는 장자못계열의 전설이 전해온다. 귀래리에 살던 돈 많은 구두쇠영감이 시주를 온 중에게 두엄을 퍼 주었다. 이를 본 그 집 며느리가 안쓰러워하며 쌀을 몰래 퍼주자, 중은 이곳은 곧 재앙을 받을 터이니 뒤를 돌아보지 말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뇌성벽력이 치고 비가 쏟아지는 통에 며느리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돌부처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방아못이 생기게 되었고 고개의 이름도 부처재라 불렀다 한다.
이 밖에도 병자호란 때 호군(胡軍)이 그 이름만 듣고도 지레 겁을 먹고 돌아갔다는 「억억다리와 만리굴전설」 · 「정조묘전설(正朝廟傳說)」 등이 있다.
이 고장의 민요는 구비전승으로 내려오는 노동요와 의식요 · 여요 · 신앙요 · 일반요 등이 있어 여러 사람들 사이에 널리 불려왔는데, 이 중에 노동요로서는 농사를 지을 때 부르는 「논매기소리」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 때는 으레 북으로 장단을 치며 반주를 하게 마련이고, 노래를 메기는 사람이 “어럴럴럴 상사디야”하고 선창을 하면 이 노래를 받아서 “어럴럴럴 상사디야”하고 후창을 한다.
“일락서산에 해떨어지고 어럴럴럴 상사디야/월출동영에 해가솟네/어럴럴럴 상사디야/이논배미를 얼른매고/어럴럴럴 상사디야/저논배미로 넘어가세/어럴럴럴 상사디야/춘하추동 사시절에/어럴럴럴 상사디야/농사밖에 또있는가/어럴럴럴 상사디야”이렇듯 힘드는 농사를 지을 때 이러한 농요를 곁들여 흥을 돋우어가며 논매기를 하면 힘도 덜 들고 일의 능률도 올라간다.
다음에는 동네에서 특별히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염불소리처럼 하면서 정월달에 농악을 앞세우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전곡(錢穀)을 얻는 일로서 고사반을 해주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태민안이 범윤자 시화연풍 돌아왔네. 한양성중 마련할 때 삼각산밑 봉황을 눌러 대궐짓고 대궐문밖 육조마련 오현문하 각도각읍을 마련할 때, 종남산이 안산이요 관악산이 화산이라. 해동유명 조선땅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원리가 이곳이라. 모씨대주……”
이와같이 소리를 하면서 그 집안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이때는 간단히 꽹과리를 치면서 이어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북 · 장구와 함께 꽹과리를 치면서 축원하기도 한다.
또한 신앙요인 「목살경」이 있는데, 세 사람이 대청마루에 앉아서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무가지를 잘라다 도투마리를 놓고 이것을 치며 「목살경」을 읽는다. 이것은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어 뜬것에 걸렸거나 나무로 인해 탈이 났을 때 악귀에게 겁을 주어서 쫓는 내용의 경이다. 이것은 무격(巫覡)에 의한 신앙을 나타내는 단면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경을 읽는 집에서는 된장을 넣고 죽을 쑤어 밖에 내다버리면서 부엌칼을 던지고 “어서 먹고 썩물러가라.”고 귀신에게 호령을 하기도 한다.
이 밖에 일반에서 부르는 민요는「사발가」나 「노랫가락」 · 「청춘가」 · 「시집살이」 · 「베틀노래」 · 「파랑새요」 · 「범벅타령」 · 「장타령」 · 「담바귀타령」 등 무궁무진하다. 예전에는 어디를 가나 이러한 민요들이 널리 불렸으나 이제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전체 토지의 35.5%가 경지이고 32.6%가 임야이며 대지 11%, 도로 6.3%, 공장이 3.7%이다. 경지 중 논은 496ha, 밭은 244ha이다. 그리고 세교저수지 · 서량저수지 · 월동저수지 등이 있어 관개 용수 및 생활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콩, 채소류로 배추 · 무 · 고추, 특용작물로 참깨 · 들깨, 과실류로 배 등이 생산된다. 과거에는 쌀 · 보리 등이 주요 생산물이었으나 교통의 발달로 대도시로 판매할 수 있는 채소 · 과일과 같은 원예작물, 가금류, 젖소 등과 같은 낙농업이 중심이 되고 있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2.6%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5.84%이다. 주요 제조업은 조립금속업 · 전자공업 · 종이인쇄공업 · 화학공업 · 섬유공업 등이다.
상업시설은 1개의 상설시장이 오산동에서 3·8일에 열리고 있어 지방 경제의 유통을 돕고 있다. 농업인구가 감소하는 반면 제3차산업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음식점 · 숙박업소 · 다방 등과 같은 서비스 시설이 증가하고 있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동쪽 부산동을 남북으로 지나고 경부선철도가 경부고속도와 나란히 지나고 있어 이들은 지역간 교류를 돕고 있다.
지곳동을 중심으로 독산성과 세마대가 있어 관광지로 알려져 있을 뿐 관광명소는 그리 많지 않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성은 도성의 문호와 군사의 요충지로 중요한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권율장군이 근왕병 2만 명을 모아 북상하던 중 이 성에서 수많은 왜군을 섬멸시키고 성을 지켰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성에서는 4개의 성문과 여러 개의 암석문을 볼 수 있다. 굴곡이 심한 지역에서는 포곡식성을 쌓았으므로 그 안에는 분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성의 결점은 물이 부족한 것이었다.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세마대라는 전설을 낳았다고 한다.
특히, 독산성에 오르면 수원 · 오산 · 신갈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산성 정상에는 정면으로 3칸, 측면으로는 2칸의 세마정이 세워져 있어 사적 관광지로 가치가 있다. 또한 세마대 바로 밑에는 보적사라 불리는 세마사가 있어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