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예(園藝, horticulture)의 어원은 라틴어의 ‘hortus’(garden, enclose:둘러싸임), ‘cultura’(culture:재배, 가꾸기)에서 유래되었으며, 1678년 처음으로 ‘horticulture’라고 표현되었다. 원예는 보통 채소원예 · 과수원예 · 화훼원예로 나눈다.
채소는 원칙적으로 신선한 상태에서 부식 또는 간식으로 이용되는 초본성 재배식물을 의미한다. 채소를 일반 작물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로, 채소는 신선한 상태로 공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채소 중에도 무말랭이 · 시래기 등의 건조채소가 있으나 이들은 본연의 이용상태를 벗어난 예외적인 것들이다. 또한 두류(豆類)는 보통작물이지만 어린 꼬투리와 같이 미숙한 것을 이용하는 경우는 채소에 속한다.
둘째로, 부식 또는 간식으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감자 · 고구마 · 옥수수 등과 같이 간식 또는 부식용으로 재배되는 경우에는 식량작물이 아닌 채소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산과 들에 자생하는 초본성 식용작물은 이용방법이 채소와 같지만 재배식물이 아닌 관계로 채소로 취급되지 않고, 산나물 혹은 들나물이라 하여 채소와 구별한다.
채소가 식품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비타민 A와 비타민 C의 함량이 많은 점, 칼슘 · 인 · 철 · 요오드 등 무기질의 좋은 급원이 되는 점, 알칼리성 식품이며 셀룰로오스(cellulose) 같은 거친 것이 들어 있어 보건적(保健的)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과수(果樹)란 생식하거나 가공해서 식용으로 쓰일 수 있는 과실을 맺는 나무를 말한다. 따라서 과수원예의 원래 뜻은 도난 · 풍해 등을 방지할 목적으로 울타리 · 담 등을 두른 토지에서 식용에 쓰이는 과실을 맺는 나무를 집약적으로 재배하는 것을 말한다.
과수의 영양학적 가치를 보면 밤 · 호두와 같은 각과류(殼果類)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85% 내외가 수분이고 탄수화물은 10% 내외이다. 그 밖에는 소량의 단백질 · 지방 및 무기염류로 조성되어 있다. 또한, 기호식품으로서 특유의 단맛 · 신맛 및 향기를 가지고 있다.
과실은 예로부터 주로 생식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저장과 수송 등 다루는 데 어려움이 많아서 최근에는 통조림이나 건과(乾果)를 만들거나 과실주(果實酒) 및 청량음료 제조에 이용되고 있다.
화훼원예란 관상을 대상으로 하는 초목류(草木類)를 집약적으로 재배하여 그 가치를 높이는 재배기술을 뜻한다. 화훼는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위안을 주는 식물이며 초본 화훼뿐만 아니라 목본 화훼도 이에 포함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관상식물이라고도 불리며 관상의 대상은 식물 전체, 즉 꽃 · 줄기 · 잎 · 가시 · 열매까지도 포함된다.
따라서 화훼원예는 재배와 관상뿐만 아니라 생산된 화훼를 재료로 하여 꽃꽂이 화훼장식에 쓰이는 한편, 정원 · 화단 · 광장 · 공원 · 녹지대 등의 배식(配植)에 초화(草花)와 화목(花木)을 곁들이는 조원(造園)의 일부에도 포함되고 있다.
이 땅에 농경문화가 시작된 것은 대략 기원전 3000년경, 신석기시대라고 한다. 이때의 작물은 기장이나 피와 같은 원시적 곡물류였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원예작물의 재배도 농경문화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일부 특수한 원예작물의 인위적인 재배보다는 야생식물의 원예적 이용이 주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단군신화에서는 마늘과 쑥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마늘과는 성격이 다른, 야생하는 알리움(allium)의 일종인 달래나 산마늘로 생각된다.
쑥은 어디에서나 무성하게 자생하는 식물이므로 재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단군신화에 쑥과 마늘이 실리게 된 것은 예로부터 이들을 영약으로 믿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식용한 채소류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세기경에는 농업이 지역의 기후조건에 적응, 분화하여 북부지방에서는 밭농사, 남부지방에서는 논농사가 발달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일반 농사가 발달한 때이므로 원예작물도 어느 정도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철제농구가 일반화되었으며 관개용 저수지가 있을 정도로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에 보면 백제의 채소는 그 종류가 중국과 대등함을 지적하고 있고, 『수서(隋書)』에도 신라의 과수와 채소가 모두 중국과 비슷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편, 농업에 관한 최고의 고전인 『제민요술(齊民要術)』은 6세기 중엽에 저술된 책인데, 북위는 만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선비족의 일파가 중국 북부에 세운 나라로 그 문화는 고구려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며, 특히 『제민요술』은 그 무대가 한반도와 교류가 많았던 산둥반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북위의 『제민요술』이 우리 나라 농업에 미쳤을 영향 등을 고려할 때, 여기에 수록된 많은 종류의 작물과 그 재배법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민요술』에 수록된 원예작물 중 채소류로는 아욱 · 상추 · 배추 · 미나리 · 마늘 · 부추 · 파 · 산마늘 · 양파 · 참외 · 오이 · 동아 · 가지 · 박 · 순무 · 무 · 토란 · 순채 · 참마 등이 있고, 과실류로는 탱자 · 대추 · 복숭아 · 앵두 · 포도 · 호두 · 오얏 · 배 · 밤 · 개암 · 감 · 석류 · 모과 · 사과 등이 있다. 이 중 삼국시대에 재배되었다는 사실이 문헌상으로 입증된 것으로는 박 · 상추 · 가지 · 오이 · 참외 · 쥐참외 · 마늘 · 마 등의 채소류와 밤 · 잣 · 모과 · 감귤류 · 복숭아 · 오얏 · 배 등의 과수를 들 수 있다.
한편, 『제민요술』에는 여러 가지 김치 담그는 법이 설명되어 있고, 쇼소인문서[正倉院文書] 등에도 각종 김치 담그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김치는 백제인에 의해서 전수되었다고 하며, 일설에 의하면 법주사 경내에 있는 돌로 된 독이 통일신라 때인 760년(경덕왕 19)에 설치되어 김치독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이 시대에 김치가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에는 배추가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고추는 훨씬 늦어서 조선 중기에 들어왔음을 생각해 볼 때, 이 시대의 김치는 배추가 아닌 다른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는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김치에 쓰였으리라고 짐작되는 채소의 종류는 당시 중국과 일본의 김치 재료로 미루어 볼 때 아욱 · 달래 · 순무 · 무 · 가지 · 동아 · 파 · 미나리 · 생강 등을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화훼 재배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390년(진사왕 6)에 궁실에서 꽃을 가꾸었다는 궁정원예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674년(문무왕 14) 안압지를 축조한 것과 궁정에 화초를 심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 당시의 화훼 재배는 산과 들에 자생하는 초화류를 심고 기른 데 불과한 것으로 보이며, 진정한 화훼원예의 시작은 백제의 국화 재배, 신라의 모란 재배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특히 모란은 632년(선덕여왕 1)에 중국 당태종으로부터 모란꽃 그림과 함께 종자가 전래되어 심었다고 하며, 신라 말엽 최치원(崔致遠)이 각 사찰을 돌면서 모란을 심었다는 고사도 있다.
왕건은 국토를 통일한 뒤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권농정책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원예도 고려시대에 이르러 일반 농사의 발전과 더불어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에는 참외 재배가 매우 성하였으며, 도성 밖에서는 무덤 주위에까지 채소포(菜蔬圃)가 확대되었다고 하니 당시의 채소 재배가 얼마나 성행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선비들도 채소 재배에 관심이 많았던 듯 시가(詩歌)에 채소밭이 나오고, 『동국이상국집』에도 참외 · 가지 · 순무 · 파 · 아욱 · 박 등 여섯 가지 채소의 형태와 이용방법을 시(詩)로 읊은 것이 실려 있다.
한편, 고려 후기에 발간된 『향약구급방』에 몇 가지 채소 이름이 나타난다. 특히 이 책은 우리 나라 문헌 중 배추가 기록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서적이다. 따라서 13세기 초에 배추가 우리 나라에서 재배되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배추가 『제민요술』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우리 나라에 들어온 시기가 13세기보다 다소 앞설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의 배추는 오늘날과는 다른 원시형이었을 것이고, 재배도 일반화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상추와 우엉이 처음으로 나타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우리 나라 상추가 청나라에까지 명성이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보다 훨씬 앞서서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엉 또한 이보다 앞서 이용되었을 것 같다.
수박의 도입 연대는 1502년(연산군 8)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도문대작(屠門大嚼)』에 의하면 고려 때 홍다구(洪茶丘)가 처음으로 개성에 심었다고 한다. 이 외에 쑥갓 · 연근 · 도라지 · 마 · 토란 · 시금치 · 죽순 등도 중국의 재배 기록과 일본에서의 도입 연대로 보아 고려시대에 재배되었으리라 추정해도 될 것 같다.
한편,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1188년(명종 18) 왕이 “곡물뿐만 아니라 밤나무 · 잣나무 · 배나무 · 대추나무에 이르기까지 때에 맞추어 심어서 열매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실려 있음을 볼 때, 고려 중기부터 과수 재배를 적극 권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도경』과 『향약구급방』에는 이러한 네 가지 외에 앵두 · 개암 · 비자 · 능금 · 오얏 · 복숭아 · 배 · 대추 · 감 · 호두 · 포도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귀족과 부잣집 뜰에는 각종 화훼류를 가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때 도입된 화훼류로는 석류 · 작약 등이 있으며, 특히 고려 충숙왕 때 몇 가지 품종의 모란과 서향화(瑞香花)가 수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에는 국정이 안정된 가운데 농업이 발전하였으나 연산군의 폭정 이래 약 200년간 외적의 침공, 내란, 흉작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중국 및 일본과의 내왕이 잦아짐에 따라 외국 작물의 도입이 시작되었다.
즉, 고추 · 호박 · 담배 등이 선조 · 광해군 때 일본 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으며, 토마토도 이때 전래되었으나 풍미가 맞지 않아 재배되지는 않은 것 같다.
조선 후기 영조 · 정조 때는 농업의 부흥을 위하여 권농정책을 펴고 농업 서적도 많이 발간하였다. 이때 배추는 이미 전국에 널리 보급되어 재배되고 있었지만 채종기술은 아직 뒤떨어진 상태였다. 일설에 의하면 반결구형(半結球形)인 개성배추 및 서울배추의 채종(採種)에 성공한 것은 헌종 때인 1850년 전후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편, 『남강만록(南岡漫錄)』에 의하면 오늘날 재배되는 서양 사과는 인평대군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서역(西域)을 통하여 들여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 때는 배와 감의 품종이 분화되어 있었으며, 또 이들의 명산지가 생겼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반층에서는 정원수 · 화목 · 화초 등의 재배와 감상이 성행한 것 같다.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저술한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에 의하면 노송 및 전나무의 분재, 석류, 치자, 장미, 동백, 배롱나무, 매화, 난초류, 일본 철쭉, 감귤나무, 석창포 등이 귀족과 부호들의 정원에 식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의 시비 · 관수 · 접목 등의 재배기술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외래 화훼로는 일본 철쭉이 1441년(세종 23)에 일본으로부터 공물로 전래되었던 것 같다. 15, 16세기에는 개나리 · 정향나무 · 명자나무 · 단풍나무 · 해당화 · 벚나무 · 원추리 등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도입된 패랭이꽃 · 금잔화 · 소철 · 봉선화 · 해바라기 · 접시꽃 · 맨드라미 등이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의 농업, 즉 작물의 종류와 재배방법, 해충의 방제법, 저장 이용방법 등에 관해서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기술한 책은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채소로는 수박 · 참외 · 오이 · 동아 · 박 · 생강 · 파 · 마늘 · 부추 · 토란 · 가지 · 미나리 · 무 · 순무 · 겨자 · 배추 · 상추 · 머위 · 시금치 · 아욱 · 쑥갓 · 고추 · 금달래 등이 있다.
이들 채소의 종자처리방법, 파종방법, 비배방법(肥培方法:거름을 주고 가꾸는 방법), 해충방제, 참외와 수박의 적심(摘心:초목의 곁순을 잘라내는 일), 박의 적과(摘果:열매 솎기), 정지법(整枝法) 등이 언급되어 있고, 마늘 · 토란 · 무 · 가지 · 아욱 등 주요 채소의 재배법이 설명되어 있다.
과수에 관해서는 나무를 이식하는 법, 실생법(實生法), 삽목법(揷木法:꺾꽂이법), 해충방제법을 설명하였고, 밤 · 대추 · 호두 · 은행 · 배 · 앵두 · 모과 · 포도 · 사과 등의 재배법을 설명하고 있다.
화훼에 관해서도 번식 · 관리 · 배양토(培養土) · 제조법 · 분재법 · 화목류의 월동법 등을 기술하였고, 노송 · 전나무 · 대나무 · 매화 · 국화 · 난 · 연 · 산다화 · 치자 · 서향 · 석류 · 일본 철쭉 · 모란 · 작약 · 접시꽃 · 정향나무 · 꽃복숭아 · 산수유 · 해당화 · 장미 · 패랭이꽃 · 파초 · 석창포 등의 재배법에 관해서도 상세한 설명이 되어 있다.
이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원예기술은 당시의 수준을 감안해 볼 때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엽 이후 제국주의 세력들의 침투와 함께 그 나라의 문물이 소개되어 농업기술 발달의 좋은 기회가 되었으나 이를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국내 상황 속에서 1890년경 영국인 · 캐나다인 · 일본인 등이 길주 · 원산 · 대구 등지에 사과 · 복숭아 · 서양 배 등을 재배하기 시작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 의도 때문에 서양의 농업기술은 국내에 정착될 수가 없었다. 1901년에 윤병수(尹秉秀)가 원산에 대규모의 사과원을 조성하고 관리하여 성공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경제적 사과 재배가 이루어진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은 농업 발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1904년에 농상공학교를 설립하고 1906년에는 농림학교를 독립시켜 농업교육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제의 침략 야욕에 의해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였다.
일제강점 이후 일본 농민이 대거 이주하여 농업 전반에 걸쳐 침략 행위를 자행하였다. 원예 분야에서 보면 원예에 대한 연구사업을 경시하였고, 종자와 묘목생산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우리 나라를 일본 종묘업의 시장으로 이용하려 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서 민족항일기를 통틀어 우리는 일본산 종자와 묘목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광복 후 수년 동안 채소 종자와 과수 묘목의 기근으로 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한편, 채소 재배에서는 일본 이주민과 중국 산둥반도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 사이에 서로 경합이 벌어져 일본인들이 뒤처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우리 나라 기후가 일본 기후와는 다른 대륙성기후라는 사실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뒤 중국인들의 채소 재배가 활발하다가 1930년대 이후부터 비로소 우리 농민들에 의한 채소생산이 급신장하기 시작하였다. 과수 재배는 1906년 지금의 뚝섬에 원예모범장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과수품종이 도입되기 시작하여 품종의 비교시험이 이루어졌다.
그 뒤 과수 재배면적은 급속히 확대되어 1944년에는 사과 재배면적이 3만1596㏊에 이르렀다. 이때의 사과는 국광 · 홍옥, 배는 장십랑 · 만삼길, 복숭아는 대구보 · 백도, 포도는 캠벨얼리가 주로 재배되는 품종이었다.
일제강점과 민생의 빈궁으로 말미암아 화훼 재배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어 민족항일기의 화훼원예는 상당히 위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주로 재배되던 화훼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봉선화 · 해바라기 · 민들레 · 할미꽃 · 백일홍 · 맨드라미 · 양귀비 · 나팔꽃 · 도라지 · 국화 · 난 · 연꽃 · 작약 · 석창포 · 석죽 · 옥잠화 · 원추리 · 제비꽃 · 베고니아 · 접시꽃 · 백합 · 수선화 · 다알리아 · 히야신스 · 매화 · 진달래 · 철쭉 · 영산홍 · 동백 · 해당화 · 장미 · 모란 · 개나리 · 무궁화 · 수국 · 치자 · 석류화 · 파초 · 종려 · 소철벚꽃 · 목백일홍 · 능소화 · 목련화 · 복숭아꽃 · 살구꽃 등이다.
광복 이후 국가적 과제였던 채소 종자의 자급은 1955년경에 이루어졌는데, 우선 무 · 배추 종자를 양적으로 충분히 자급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자가불화합성과 웅성불임성을 이용한 품종 육성이 원예시험장에서 착수되어 F₁품종의 육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육성된 F₁품종의 양친 계통을 민간 종묘회사에 분양하여 F₁종자를 생산, 보급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이것이 효시가 되어 각 종묘회사마다 F₁품종을 육성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불과 20년 만에 주요 채소작물들을 연중 어느 때라도 생산할 수 있도록 품종이 분화되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종자 수출이 시작되어 1985년에는 무를 비롯한 34만6685lℓ의 종자가 수출되어 324만 달러의 소득을 올렸다. 반면에 약 144만 달러에 달하는 18만3395ℓ의 종자가 수입되었다.
① 육묘(育苗) : 채소육묘는 노지육묘 · 보온육묘(냉장육묘) · 가온육묘 등으로 구분되는데, 1960년대까지는 대부분 노지에서 육묘하거나 양열물을 이용한 양열온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시설원예의 발달과 함께 일부만이 양열온상을 이용하고 있을 뿐, 전열온상이나 온수보일러를 이용한 가온육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육묘에 이용되는 자재의 발전도 함께 뒤따랐는데, 포트(pot)를 이용한 육묘법이 1900년대 초에는 짚분 · 종이분 등이 이용되었으나, 1950년대 중반 국내에서 플라스틱 필름이 생산되면서부터 육묘용 플라스틱 포트가 일반화되었다.
최근에는 육묘 후 정식 때 기계화를 감안한 성형포트(成型 pot)가 개발, 이용되는 단계까지 옴으로써 정식(定植) 때 식상이 거의 없고 정식 노력을 크게 절감하게 되었다. 한편, 특수한 방법에 의한 육묘로 채소의 접목육묘가 있다.
이러한 방법은 수박의 토양전염성 병해를 막을 목적으로 시도되었는데, 농가에서 실제로 실용화된 것은 1950년에 들어서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근에는 오이 · 멜론 · 토마토 · 고추 등과 같은 과채류에서 접목 재배가 일반화되어 가고 있으며, 대목은 내병성 · 내서성 · 내습성 · 저온신장성과 같은 특성을 지닌 것들이 이용되고 있다.
양액을 이용한 양액육묘에 대해서는 197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왕겨 · 숯 등의 훈탄을 많이 이용하였으나 최근에는 암면포트(rockwool pot)를 이용한 양액육묘가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액육묘는 주로 양액 재배 농가에서 이용하고 있는 정도이다.
② 시비(施肥) : 우리 나라에서 화학비료가 처음 생산된 것은 1910년으로, 그 이전에는 인분뇨 · 계분 · 구비 · 볏짚 · 온돌재 · 산야초 · 쌀겨 · 깻묵 등이 사용되었다. 민족항일기에는 질소 위주의 시비가 이루어져 칼리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극히 낮은 상태였다.
3요소 비료의 균형 시비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부터라고 볼 수 있다. 1958년부터 농가 포장의 토양 검정이 실시되었고, 1960년대 초부터 석회의 시용을 권장하게 되었으며, 황산암모늄의 시용이 감소된 반면 요소 시용이 증가되었고, 복합비료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초에는 엽면 시비용 액체비료가 시판되기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 초부터는 시설원예에서 추비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관수(灌水)와 동시에 시비할 수 있는 액비혼입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③ 관수 : 1950년 초까지만 해도 채소에 대한 관수는 거의 생각할 수 없었고, 단지 경종적인 방법이나 관개용수가 충분한 곳에서만 이랑관개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시설 재배에서 집약관리가 이루어지면서 플라스틱 호스를 이용한 관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68년부터는 스프링클러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 초반부터는 튜브에 의한 점적관수(點滴灌水)가 일부 농가에서 이용되었고, 1978년부터는 핀식 점적관수와 노즐을 이용한 관수가 실시되어 토양 수분관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는 원예작물의 생산성 향상에서 관수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채소 재배에 대한 지하수 개발 등에 정부의 보조가 시작되었다. 특히 1980년부터는 관수에 대한 연구가 확대되고 있고, 시설 재배에서는 관수의 자동화가 일부 농가에서 시작되고 있다.
④ 제초 및 병충해 방제 : 채소 포장에서는 호미를 이용한 중경제초가 이루어져 왔으나, 1970년대부터는 노동력의 부족 등으로 각종 채소에 대한 제초제 사용이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는 주로 수도와 과수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을 뿐이며 채소밭에서는 일반화되지 않고 있으나 앞으로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일반화되리라고 본다.
이처럼 화학적 잡초방제가 많이 이용되지 않는 반면, 1960년대부터 흑색 플라스틱 필름을 재료로 활용함에 따라 잡초의 방제효과뿐만 아니라 토양 온도 상승, 토양 수분 확보 등의 부수적인 효과까지 인정되어 노지작물 재배에 보편화되었다.
또한 병충해 방제를 위해서는 종자소독제를 비롯한 각종 농약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병충해 방제는 용이해졌으나 유독성 농약의 사용으로 천적(天敵)이 사라지게 되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생물적 방제기술이 연구되고 있다.
한편, 각종 잔류 독성이 낮은 농약들이 개발되어 시판되고 있으며, 시설 재배에서는 토양 전염성 병해를 막기 위해 태양열을 이용한 토양 소독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병충해 방제에 있어 농약의 사용이 작물의 수량 증가에 기여한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⑤ 시설 재배 : 우리 나라의 시설 재배는 1920년대 대전과 송정리에서 보온 재배로부터 시작되어, 1954년 플라스틱 필름이 생산되면서 본격적인 비닐터널과 비닐 규모가 커지고 고정화되면서 재배작물도 다양해졌으며, 과채류를 중심으로 촉성 재배가 시작되었다.
1970년대에는 자연광에 의한 보온 위주에서 벗어나 난방과 관수시설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초부터는 각종 보온자재가 농가에서 실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피복방법도 많이 개선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원예시험장에서는 시설 내에서 태양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지중축열하우스와 축열물주머니가 연구, 실용화되었다. 기온 · 일사량 · 적설량 · 바람 등의 기상조건을 감안하여 시설원예의 적지가 선정되었으며, 지역과 작물별로 난방열 요구량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발표되어 시설원예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최근에는 시설 안에서 작업을 생력화하기 위한 장치화 · 기계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시설 안의 재배환경을 자동화할 수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농가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편, 1954년부터 양액 재배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이래 농가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80년대 초부터 양액 재배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재배 농가가 증가하고 있다. 즉, 청정(淸淨)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피막양액 재배, 암면 재배 등과 같은 새로운 양액 재배가 시작되고 있다.
광복 후 우리 나라 과수원의 약 80%를 차지하던 일본인들이 돌아가게 되자 연간 30만 주 가량을 일본에서 도입하여 충당하던 과수 묘목을 자급해야만 했다.
이를 위하여 정부에서는 광복 직후 김해농장에 과수육묘장을 설치하고 과수 묘목을 국가에서 생산, 공급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 초반에는 국내의 묘목 수요를 자급하게 되었다.
1960년까지는 과수 품종개량을 위한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1960년 이후부터는 원예시험장 연구진이 강화되고 직원들의 해외 유학이 실시되면서, 외국에서 육성된 각종 과수의 품종들이 다량 도입됨으로써 풍토적응시험을 거쳐 좋은 품종을 농가에 보급하게 되었다.
1971년부터는 사과의 스퍼타입(spurtype) 계통 품종과 사과의 왜성(矮性:생물의 몸이 그 종의 표준 크기에 비해 매우 작은 것)대목(臺木:접을 붙일 때 바탕이 되는 나무)이 도입되어 사과 재배에 일대 전환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스퍼타입 품종은 품질이 다소 미흡하여 널리 보급되지 못한 채 중단되었고, 왜성 대목은 M26 대목이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어 이것이 우리 나라에 적합한 사과의 왜성 대목이라고 인정되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이보다 더 왜화성이 강한 M9의 대목을 이용하여 초밀식 재배를 시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국내에 산재되어 있는 감 · 살구 · 대추 · 밤 · 호두 · 나무딸기 · 개암 등을 수집 조사하여 우량 품종을 선발하는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져 감 · 살구 · 대추 · 밤에서는 좋은 품종이 많이 소개된 바 있다. 특히 1980년대 대추에서 금성(錦城) · 무등(無等) 두 품종이 선발, 보급되어 재배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장기간을 요하는 교잡 육종은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1972년에 우리 손으로는 처음으로 배의 ‘단배’ 품종이 육성되었고, 1977년에는 복숭아의 ‘유명(有明)’품종, 1983년에는 복숭아 극조생종인 ‘백미조생(白美早生)’이 육성된 바 있다.
그리고 그 뒤에도 계속하여 배 · 사과에서 우량 신품종이 육성되어 보급단계에 있으며, 포도와 복숭아에서도 신품종이 육성되기 시작하고 있다. 즉,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다음과 같은 많은 신품종이 육성되었다.
사과는 홍로(紅露) · 추광(秋光) · 서광(署光) · 감홍(甘紅) · 화홍(華紅) 등이고, 배는 원황(圓黃) · 황금(黃金) · 수황(秀黃) · 영산(榮山) · 화산(華山) · 수정(水晶) · 감천(甘川) · 추황(秋黃) 등이며, 포도는 홍단(紅丹) · 청수(淸水)이다. 복숭아는 천홍(天紅) · 월미(月美) · 백향(白香) 등이다.
① 시비 및 영양 : 1950년대까지는 과수에 대한 속효성 질소비료의 사용 시기와 방법 등에 관한 시험과 석회효과시험 등에 머물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와서 해외 연수 후 귀국한 연구원들이 많아짐에 따라 여러 가지 분석기기를 도입하게 되었고, 이것을 이용하여 전국의 각종 과수에 대한 영양진단시험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67년에는 우리 나라 과수원을 우량 · 보통 · 불량으로 구분하여 엽분석(葉分析)을 실시하고 연구함으로써 영양 진단을 할 수 있는 예상임계점을 설정하였으며, 사과 · 배 · 복숭아 · 감귤 · 포도 등에 대한 영양원소 균형도표를 작성하여 각종 과수의 영양 진단을 실시함으로써 시비 처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과수의 생리 장애가 발생하는 원인과 방제법을 구명하는 각종 시험이 포장 및 수경 재배를 통해 이루어져 포도과육흑변현상, 사과나무적진병, 조피병, 신초고사현상, 과피흑변현상 등 많은 과제들을 해결하게 되었다. 그 밖에 각종 식물생장조절제의 효과를 규명하는 시험도 많이 이루어졌다.
② 결실관리 : 결실 증진을 위한 포도의 적심시험(摘心試驗)을 비롯하여 1960년대 초반부터는 사과의 조기 낙과를 유발하는 농약의 선발이 이루어졌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낙과를 유발하는 농약을 이용한 사과의 적과시험이 실시되어 살포 시기, 살포 농도, 낙과 정도, 낙과된 과실의 착과 위치 등 여러 가지가 규명되어 사과의 약제적과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 뒤 계속하여 배 · 복숭아 · 감귤에 대한 약제적과시험이 실시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어 곧 이용단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기타 생장조절제를 이용한 나무의 왜화 및 조기 결실 유도 지베렐린(gibberellin)을 이용한 씨 없는 포도의 생산 등도 실용화 단계에 들어가 있고, 사과의 후기 낙과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험도 실시되어 성과를 거둔 바 있다. 또한 새로운 약제를 이용한 낙과방지시험도 계속 실시되고 있다.
③ 병충해 방제 : 각종 해충과 병균에 의한 피해를 방제하기 위해 병해충의 생태를 연구하는 동시에 이것을 방제할 수 있는 농약 비교시험이 계속 실시되고 있다.
사과의 부란병 · 동고병 · 부패병 · 갈반병 · 탄저병 등에 대한 효과적인 약제가 계속 규명되어 피해를 많이 경감시키게 되었다.
사과뿐 아니라 다른 과수에 대해서도 주요 병해충의 피해 방제를 위하여 새 농약의 선발시험을 계속하는 한편, 병해충 발생의 예찰사업도 실시하여 조기 또는 적기 발견과 적기 약제 살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시험도 실시되고 있다. 또 감귤에 대해서는 천적을 이용하기 위한 종합 방제법도 시험하고 있다.
④ 저장 및 가공 : 1960년대까지는 아무런 기계시설이 없는 보통저장고를 이용한 저장시험이 실시되었으나, 1970년대부터는 저온저장고를, 1980년대부터는 CA저장고를 이용한 시험과 물질대사 등 생화학적인 면에서 과실저장 때 발생되는 장해의 기작(機作)을 규명하게 되었다.
가공에서는 각종 가공에 적합한 과수품종의 선택에 역점을 두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저장 · 가공 기술의 개발을 위해서도 많은 시험이 실시되고 있다.
화훼 발전은 산업구조의 근대화와 함께 취미화훼의 영역을 벗어나면서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즉, 화훼 발전의 초기단계에는 도시 · 공공주택 · 도로 미화에 필요한 관상수의 생산 증가와 함께 잔디의 소비도 증가되고, 그 뒤 개인주택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절화 및 분화의 생산 증가가 일어나며, 뒤이어 구근 및 화단화훼를 위한 종묘의 생산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1960년대 초까지는 일부 사람에 의한 취미화훼로 분식물과 정원수를 중심으로 한 취미 위주의 화훼가 이루어져 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주 해결에 급급했을 뿐 환경을 가꾸어 감상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작된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취미 위주의 화훼에서 생산화훼 · 조경화훼 · 실내화훼 등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 나라 화훼 육종은 극히 미약했으나 1960년대 말부터 농과대학에서의 무궁화와 잔디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40여 품종의 무궁화가 육성되었으며, 원예시험장에서는 철쭉류 11계통을 선발하는 등 새로운 품종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화훼 번식 분야에서는 그 동안 종자 번식이 안 되던 잔디 종자 발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종자 파종에 의한 나지녹화공법이 개발되었으며, 각종 관상수목의 번식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농가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 밖에도 카네이션 · 국화 · 난 등의 무병주 생산체계가 확립되었고, 이에 따라 시설을 이용한 주변 생산체계가 이루어졌다.
우리 나라의 채소원예는 과학적 연구의 역사는 얼마 안 되는 데 비해 매우 빨리 발전해 왔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채소는 40여 종류인데, 그 중 주요 채소는 약 20여 종류이다.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많은 주요 채소로는 고추 · 배추 · 무 · 마늘 등인데, 이들은 김치 재료로 가장 많이 쓰이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 채소원예는 김치재료 생산이 주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채소의 연도별 생산 동향을 살펴보면, 1960년대에 비해 1970년대 초에는 생산증가율이 상당히 둔화되는 경향을 나타냈으나, 1985년 채소의 재배면적은 33만7227㏊로 증가되어 708만3160M/T을 생산하였다.
작물별 재배 동향을 보면 1970년대 초까지는 엽근채류(葉根菜類)의 비중이 컸으나, 그 뒤 조미채소류의 재배면적이 계속 증가되어 전체 재배면적의 50% 이상을 차지하였다. 특히 고추와 마늘의 재배면적이 15만6892㏊에 달하여 채소 전체 재배면적의 46%나 되었다.
이처럼 재배면적이 조미채소에 편중되어 있는 것은 국민보건과 채소원예의 경영적 측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다. 최근 각 연구기관에서는 각종 재해로 인하여 수량 변동과 가격 진폭이 큰 작물에 대해 내병성 · 내재해성 품종 육성과 재배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특히 배추 재배의 변천을 보면 1960년대에 봄 · 가을 배추 재배가 주가 되었으며 여름배추는 800m 이상의 고랭지에서만 재배가 가능했으나, 1970년대에는 400m 고지에서까지 재배가 가능하도록 새로운 품종을 육성하였으며, 겨울철에는 하우스를 이용한 배추 재배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에는 평지 여름 재배용 새 품종을 원예시험장에서 육성함으로써 이제는 평지에서도 여름철 결구배추 재배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각 작물별 기상조건과 병충해를 고려한 새로운 작형이 개발됨에 따라 연중 재배가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채소의 시설 재배지역은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1년 내내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채소 재배용 하우스 시설면적은 매년 증가하여 1971년에 1,014.9㏊였으나 1985년에는 1만6569.0㏊에 달하여 약 16배의 증가를 나타냈다. 재배면적은 전체 채소 재배면적의 5.8%밖에 안 되지만, 재배하기 어려운 시기에 신선한 채소를 공급해 준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국민경제의 발전으로 소득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도시가구의 농산물 구입방법이 변모되어 겨울철과 이른 봄철에 신선한 채소의 소비 수요가 점차 증가되었고, 새로운 채소 품종과 재배기술이 개발 · 보급됨에 따라 시설채소 재배가 확대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995년 채소 생산량을 보면 총 재배면적 17만2361ha에 223만5600M/T를 생산하였다. 그 중에 고추 19만3331M/T, 마늘 46만1735M/T, 파 55만3163M/T, 양파 97만4619M/T, 생강 5만2752M/T을 생산하였다.
채소의 소비 추세는 매년 증가 경향을 보여 1961년에 1인당 46.3kg을 소비했으나 1970년대에 소비량이 급속히 증가하였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200kg 정도 계속 소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소비 측면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연중 채소 수요가 평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생활 수준의 향상에 따른 식생활의 다양화 · 고도화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기술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재배기술과 다양한 품종의 육성에 따라 신선한 채소의 주년공급체계가 확립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채소 소비량은 어느 정도 적정 수준에 달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앞으로 우리 나라 채소원예가 해결해 나아가야 할 과제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품종개량:그 동안 육종 분야에서 대단한 성과가 이루어졌으나 품질이 좋은 신품종을 계속 육성해야 되겠다. 앞으로는 가공 및 저장용 품종의 육성이 이루어져야만 채소의 생산 · 수급이 안정화될 것이다. 또한 조직 배양과 유전공학기법에 의한 대량 증식 및 신품종개발이 요망된다.
② 채소 종류의 다양화:우리 식생활양식으로는 무 · 배추 · 마늘이 채소의 주종을 이루고 주로 이것들이 재배되어 왔으나, 국민보건적 측면에서 영양적 가치를 생각하여 양채류와 같은 새로운 채소류를 도입해야 한다.
③ 채소 재배의 생력화(省力化):우리 나라의 채소 재배 기술체계는 토지 이용면에서 볼 때 노동집약형이다. 그러나 공업화에 따른 농촌의 노동력 부족사태가 심각한 상태에 있으므로 생력적 재배기술체계의 확립이 필요하다.
생력화가 가능한 것으로는 공동육묘 · 경운 · 정지 · 농약 살포 · 제초 등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투하 노동량이 많은 시설채소 재배에서는 각종 장치화에 의한 생력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더 나아가 전산시스템의 도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과수의 재배면적과 생산량은 해마다 증가되는 추세에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감귤의 재배면적은 1961년에 비해 1985년에는 약 60배로 증가하는 급신장세를 보였다.
1996년 과실 총생산량은 전체 재배면적 17만4130㏊에서 230만65t이었다. 1996년에 사과 생산량은 71만5900t으로 과실 총생산량의 31.5%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역별로는 경상북도에서 총 사과 생산량의 68.1%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급진적인 재배면적의 증가와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진 감귤은 2만5000㏊의 면적에서 61만4800t이 생산되어 사과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과수가 되었다. 그 밖에 복숭아 · 배 · 포도 · 감 등 모든 과수의 재배면적과 생산량도 매년 증가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과실의 가공 현황을 보면 주로 포도 · 감귤 · 복숭아 · 사과 등을 이용하여 통조림 · 주스 · 넥타 · 술 등이 가공되었다. 과수 품종은 그 동안 새로운 우량 품종의 도입 및 육종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사과는 1970년대에는 홍옥과 국광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1980년대에 각각 16% 정도로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1996년에는 후지가 75%, 쓰가루가 약 20%를 차지하는 주요 품종으로 등장하였다.
배는 1970년대에는 장십랑 · 금촌추 · 만삼길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 1980년대에는 이들이 점차 감소되고 신고의 재배면적이 많이 증가되어, 1990년대에는 신고가 주요 품종을 이루고 국내에서 육성한 황금배 등 신품종이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복숭아는 1970년대에 창방조생 · 대구보 · 백도 등 백육계(白肉系) 품종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가공용인 황육계(黃肉系)가 늘어났으며, 앞으로도 계속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포도는 1970년대에 주종을 이루던 캠벨얼리가 1990년대에도 주도적인 품종이다.
이는 재배가 쉽고 추위에 견디는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품질이 좀더 우수하며 씨가 적고 알이 굵은 거봉 계통의 개량품종 재배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과수 재배기술의 특징은 사과 왜성 대목묘를 이용한 왜화 재배라고 볼 수 있다.
사과 재배는 왜성 대목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키가 큰 일반 사과 재배로 10a당 18주가 재식(栽植)되었으나 최근 왜성 대목 M26의 사용으로 10a당 80주를 재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일반 대목에 비하여 나무의 키가 8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극왜성 대목 M27에는 이보다 더 왜화성이 강한 M9대목이 보급될 전망이다.
왜화 재배는 큰 나무를 재배하는 데 비해 적과 · 수확 · 약제 살포 · 전정 등의 작업이 더욱 간편해지므로 노동력이 많이 줄어 생산비 절감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과수는 일반 작물과 달리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관계로 가능한 한 모든 분야에서 기계화가 요망되고 있다.
특히 많은 인력을 요하는 작업은 약제 살포 · 제초 · 적과(摘果) 작업 등이다. 약제 살포에서는 고속 분무기의 이용이 증가되고 있으며, 제초작업과 적과작업은 일부 제초제와 적과제 등 화학물질이 실용화됨에 따라 과수 재배에서 많은 생력화가 이루어졌다.
과실의 생산량은 최근 급속히 증가되어 왔으며, 소비도 계속 증가되어 왔다. 과실의 소비량은 1996년 현재 1인당 약 54㎏에 이르고 있으나 선진국에 비해서는 아직도 적은 실정이다.
앞으로 경제의 발전과 국민 식생활의 개선으로 과실의 수요는 급증할 것이며, 지금은 주로 생식용으로만 이용하고 있으나 앞으로 과실가공품의 소비가 일반화되면 수요는 급증될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 기상조건은 온대 과수 재배에 알맞기 때문에 맛이 좋은 과실의 생산이 가능하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과수 재배가 가능한 구릉지가 많이 있으므로 재배면적의 확대는 가능하며, 가공과 수출의 여지도 많으므로 품질 좋은 과실을 많이 생산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면 과수 재배의 전망은 매우 밝다.
우리 나라 화훼원예가 경영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역사는 극히 짧다. 꽃이 농업적 측면에서 생산되고 상품으로서 거래가 이루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6·25전쟁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화훼 재배의 초기단계에는 소규모 생산단계와 행상 · 중개상의 역할로 소매점과 가두판매에 그쳤으나, 1970년대부터 국민경제의 급격한 성장과 더불어 국민소득의 증대는 생활양식을 변화시켜 왔다.
이와 더불어 생활 수준의 향상과 생활환경의 변화로 국민 정서생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꽃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급격히 증대되어 왔다. 부업으로 시작된 화훼 농가가 전업화되고 있으며, 이것은 화훼 재배가 기술과 자본의 집약적인 농업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농업 분야에 비해 높은 소득 작물이기 때문이다.
화훼 생산을 종류별로 보면, 단가가 높은 관상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이 분화 · 절화 · 화목의 순이다.
화훼류는 수출잠재력이 큰 농업이다. 종류별로 보면, 수출되는 화훼류 중에서 절화가 전체의 90% 이상이나 되며, 그 밖에 종자류 등이 수출되고 있다. 1980년 이후 수입이 증가된 것은 1981년 화훼류 전체 품목이 수입자동승인 품목으로 바뀜에 따라 수입이 촉진된 데 따른 것이다.
주요 수출품목은 동백 · 석류 · 찔레 · 모란 · 선인장 등과 같은 식물과 잔디 · 코스모스의 종자류이다. 반면에 수입품목은 과꽃 · 폐튜니아 · 메리골드 · 금잔화 등의 종자와 글라디올러스 · 백합 등의 구근류이다.
수출대상국별 수출실적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일본에 수출되고 있으며, 그 밖에 사우디아라비아 · 네덜란드 순이다. 수입대상국은 일본 · 네덜란드 · 미국 · 인도네시아 등이다.
화훼는 다른 농작물에 비해 수요의 소득탄력성이 높은 품목으로 앞으로 국민생활의 향상과 더불어 그 수요는 계속적으로 증가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우량 종묘를 육성하여 양질의 화훼를 생산하고 수출 촉진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화훼류의 수출 전망은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