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청(子淸). 유자해(柳子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균(柳均)이다. 아버지는 선전관 유인습(柳仁濕)이며, 어머니는 이효복(李孝福)의 딸이다.
1480년(성종 11) 사마양시에 합격한 뒤 1483년(성종 1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89년 정언(正言)을 지냈다. 1492년 문관과 선전관들의 활쏘기대회에서 2등을 하였다.
1494년 장령(掌令)을 거쳐, 1496년(연산군 2)에 집의(執義), 1498년에 부제학을 거쳐 이듬해 함경도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이어 병조참지·이조참의·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호남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연산군의 방탕이 날로 심하여 나라가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하여, 이과(李顆)·김준손(金駿孫) 등과 함께 진성대군(晋城大君: 뒤의 중종)을 추대하고자 계획하였다. 격문을 서울에 전하였는데, 사자가 도착하기 전에 반정이 일어났다.
1507년(중종 2)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경기감사 재임 중에 죽었다. 성품이 겸손하고 공직(公直)하여 요직에 있으면서도 항상 공사를 분명히 하여 사림의 칭송을 받았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