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빈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형조참판, 이조판서,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청(子淸)
시호
충정(忠定)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509년(중종 4)
본관
진주(晉州)
주요 관직
병조참지|이조참의|형조참판|이조판서|경기도관찰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형조참판, 이조판서,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청(子淸). 유자해(柳子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균(柳均)이다. 아버지는 선전관 유인습(柳仁濕)이며, 어머니는 이효복(李孝福)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80년(성종 11) 사마양시에 합격한 뒤 1483년(성종 1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89년 정언(正言)을 지냈다. 1492년 문관과 선전관들의 활쏘기대회에서 2등을 하였다.

1494년 장령(掌令)을 거쳐, 1496년(연산군 2)에 집의(執義), 1498년에 부제학을 거쳐 이듬해 함경도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이어 병조참지·이조참의·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호남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연산군의 방탕이 날로 심하여 나라가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하여, 이과(李顆)·김준손(金駿孫) 등과 함께 진성대군(晋城大君: 뒤의 중종)을 추대하고자 계획하였다. 격문을 서울에 전하였는데, 사자가 도착하기 전에 반정이 일어났다.

1507년(중종 2)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경기감사 재임 중에 죽었다. 성품이 겸손하고 공직(公直)하여 요직에 있으면서도 항상 공사를 분명히 하여 사림의 칭송을 받았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동각잡기(東閣雜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