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남양주시 · 포천시, 서쪽은 양주시, 남쪽은 서울특별시, 북쪽은 양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0′∼127°09′, 북위 37°41′∼37°45′에 위치한다. 면적은 81.54㎢이고, 인구는 43만 3937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5개 행정동(13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있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속하고 있어 잔구성 산지가 동쪽과 서쪽에 높이 발달하고 있으며 중앙에는 추가령구조곡이 지나고 있는데 이곳에는 길고 좁은 곡저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해발고도 100m 이하의 저지대가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100∼500m의 구릉지가 전체 면적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동쪽에는 수락산(水落山, 638m) · 부용산(芙容山, 211m) · 용암산(龍巖山, 477m) · 깃대봉(289m) 등이 있고, 서쪽에는 도봉산(道峰山, 717m) · 사패산(賜牌山, 552m), 북쪽에는 천보산(天寶山, 337m)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는 주상절리가 발달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산지는 노두가 나타나 주변 경관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부용천(芙容川) · 백석천(白石川) · 화룡천(畵龍川) 등이 서류(西流) 또는 동류(東流)하여 중랑천(中浪川)에 합류하면서 남류하고 있다. 하천 주변지에 하안 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0.9℃, 1월 평균기온 -6.2℃, 8월 평균기온 26℃로 한서의 차가 30℃를 넘고 있어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나타내며, 연강수량은 1,315㎜이다.
민락동에서 흑요석기를 포함하는 제4기층이 발견되어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으며,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금오동 · 고산동 · 용현동일대에서 간돌칼 · 간돌화살촉 · 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고조선시대에는 진(辰)에 속했고,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초기에는 백제에 속했으나 475년 이후 고구려에 속하여 매성군(買省郡, 일명 昌化郡)이라 하였으며, 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내소군(來蘇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견주(見州)로 이름을 고쳤고, 1012년(현종 3) 양주의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로 개편되었다. 1018년 양주에 편입되었으며,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로 개칭되었다.
조선 초인 1394년(태조 3) 다시 한성부로 개명되면서 부치(府治)가 동촌 대동리(大東里: 현재의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부근)로 옮겨지고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칭되었다. 1397년에 부치가 다시 옛 치소인 견주(현 양주시 고읍동)로 이전되고 양주부라 불렸다. 1413년(태종 13) 양주도호부로 고쳐지고 속현으로 견주(見州) · 사천(沙川: 동두천시 전역과 양주시의 은현면지역) · 풍양(豊壤: 남양주시의 진접읍 · 진건읍지역)의 3현을 두었다.
1466년(세조 12)에 다시 양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양주목이 폐지되고 왕의 수렵지구로 될 때 의정부시는 잠시 폐허가 되기도 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다시 복구되어 양주목의 소속이 되어 계속 갑오개혁 때까지 양주목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의 팔도제가 폐지되고 23부 336군이 새로 설치되게 되어 양주목이 한성부 소속의 군이 되었을 때 의정부시는 양주군의 시북면(柴北面) · 둔야면(芚夜面)지역에 속하였다. 1912년 행정구역개편 때 양주군 32개 면 중 시북면 · 둔야면지역으로 오늘의 의정부시의 모체를 이루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시북면과 둔야면이 시둔면(柴芚面)으로 개칭되었고, 1922년에 주내면 유양리에 있던 양주군청사가 시둔면 의정부리로 옮겨오게 되어 의정부시는 양주군의 심장부를 이루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시둔면이 양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42년 양주면이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1950년 6·25사변 때는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군사도시로서의 변천을 겪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1일에 시로 승격되면서 한수(漢水) 이북의 경제 · 사회 · 문화 · 군사 ·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1980년 4월 1일에는 양주군 별내면의 고산리와 산곡리가 편입되었으며, 1994년 7월 1일 장곡동이 장암동과 신곡동으로, 1995년 3월 2일에는 신곡동이 신곡 1,2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1998년 10월 14일 의정부 1동과 4동이 통합되었고, 2003년 2월 3일에는 호원동이 호원 1,2동으로, 송산동이 송산 1,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와 같은 15개 행정동이 되었다.
선사유물로 마제석검이 금오동에서 발견되었다.
불교 유산으로는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한 비룡사(飛龍寺)터에 중창된 쌍룡사(雙龍寺)가 있고, 1395년(태조 4)에 무학(無學)이 창건하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중건한 호원동의 회룡사(回龍寺)에는 회룡사 오층석탑 · 회룡사 석조 · 회룡사 신중도 · 회룡사노주 등이 있다. 회룡사 오층석탑은 2003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회룡사 석조와 회룡사 신중도는 200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이외 호원동의 약수선원목조보살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2001년 지정)도 있다.
또한, 639년(선덕여왕 8)에 해호(海浩)가 창건한 뒤 여러 차례 중건한 호원동의 망월사(望月寺)에는 망월사 혜거국사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 망월사 천봉당태흘탑 · 망월사 천봉선사탑비 등이 있다. 망월사 천봉당태흘탑과 망월사 천봉선사탑비는 1985년 경기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유교 유산으로는 장암동에 노강서원(경기도 기념물, 1977년 지정)과 서계박세당사랑채(경기도 문화재자료, 2000년 지정), 하석박정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2001년 지정), 금오동에 효민사(孝愍祠), 민락동에 송산사지(경기도 기념물, 1977년 지정), 호원동회룡사 경내에 백범사(白凡祠) 등이 있다. 송산사는 조윤(趙胤, 호는 宋山) 등 고려 말의 여섯 충신의 절의를 추앙하여 1798년(정조 22)에 세웠으며, 백범사는 김구(金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이다.
능묘로는 용현동에 정문부장군묘(경기도 기념물, 1977년 지정), 고산동에 신숙주선생묘(경기도 기념물, 1985년 지정)가 있고, 금오동의 능묘군에는 정빈민씨묘(靜嬪閔氏墓) · 인성군묘(仁城君墓) · 해원군묘(海原君墓)와 해원군신도비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주군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의정부 관내에는 교육기관이 없어 이웃 주내면의 양주향교와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교육을 의존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899년에 주내면 유양리(현 양주시 유양동)에 양주소학교가 개교하였다가 1919년에 의정부동으로 이전하여 현재의 중앙초등학교가 되었다. 그 뒤 송양(松陽) · 의정부 · 호암(虎巖) 등 많은 초등학교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43년에 4년제 의정부농업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뒤에 의정부중학교와 의정부농업고등학교로 분리되었고, 의정부농업고등학교는 현재 의정부공업고등학교가 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2개교, 중학교 19개교, 고등학교 16개교, 특수학교 2개교와 신한대학교, 경민대학교가 있다.
문화제행사로는 회룡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천보산(天寶山, 337m)정주당(定州堂)에서 행해지던 ‘정주당놀이’를 들 수 있다.
이 놀이는 유래가 깊은 것으로 약 35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서는 조선의 여인들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강요해왔고 마침내는 왕족의 처녀들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되는 수모를 겪어야 하였다.
그러던 중 당시 금오동에 살고 있던 왕족의 딸이 청나라로 잡혀가다가 평안도 정주땅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에게 욕된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는 편이 낫다고 결심하여 가파른 벼랑에서 물로 뛰어내려 자살을 하였다.
이에 수행하던 노복들이 시신이나마 거두려 하였지만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겨우 건져와서 금오동 선영(先瑩)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곳을 지금도 족두리산소라 부른다. 이 일이 있은 뒤 조정에서는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큰당 · 작은당 · 색시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정주당놀이는 이때부터 이 고장의 민속놀이 겸 동제로 전승되어왔는데, 이른 봄 화창한 날을 골라 마을사람들은 비명에 간 왕족여인의 넋을 위안하고 풍년과 무병 · 재수를 빌며 고사를 지낸 다음 놀이를 벌이면서 하루를 즐겼다.
제수는 백미로 지은 밥과 생미역으로만 끓인 국을 쓴다. 제일이 되면 마을주민들은 아침 일찍 당 앞에 모여 제를 지내고 농기를 앞세워 꽹과리 · 날라리 · 북 · 장구 · 징 등으로 농악을 연주한다. 마을주민들은 이 농악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추면서 횃불을 들고 천보산 능선을 여러 차례 왕복한다.
6·25전쟁 이후 한때 이 놀이의 전승이 중단되어 당제만 지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만 받들었는데, 1985년부터 민속놀이로 재현되어 주민의 화합과 전통을 다지고 있다.
이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특별한 동제는 없다.
이 고장에서는 전설보다 민담이 널리 전승되고 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 「견묘쟁주(犬猫爭珠)」 · 「여인국 제주도」 · 「동자삼(童子蔘)」 · 「보은설화(報恩說話)」 등의 민담과 소화(笑話)가 많다.
「의정부 지명유래전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한양으로 환궁할 때 이곳에 이르러, 태종에게 국새(國璽)를 넘겨준 뒤 환궁하지 않고 이곳에 계속 머물렀다. 그러자 조정의 대신들이 이곳까지 와서 정무를 의논하고 윤허를 받았다는 데서 의정부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는 전설이다.
남이(南怡)에 관한 일화가 전하는데, 소년시절의 남이가 보리방아 찧는 여자를 겁탈하려다 실패하자 그 여자를 죽인 일이 있었다. 그 뒤에 남이가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리오.”라는 내용의 글을 임금에게 올렸는데, 평(平)자가 득(得)자로 바뀌어서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평자가 득자로 바뀐 조화는 남이에게 억울하게 죽은 여자의 소행이라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설화내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서당의 훈장이 벽장에 곶감을 감추어두고 학동들에게 말하기를 “벽장에 먹으면 죽는 곶감이 있다.”고 말한 다음 외출하였다. 꾀 많은 한 학동이 벽장 속에 있는 곶감을 꺼내어 다 먹어치우고 훈장이 아끼던 벼루를 일부러 깨뜨려버렸다.
외출하고 돌아온 훈장에게 “선생님께서 아끼시던 벼루를 깨뜨려서 죽으려고 벽장 속의 곶감을 꺼내어 먹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밖에도 메뚜기 이마가 벗어지고 개미 허리가 가늘어진 내력에 관한 이야기와 함안조씨 및 풍천노씨의 유래담, 그리고 「곰나루전설(熊津傳說)」 등의 설화가 전승되어오고 있다.
이 고장은 서울과 근접해 있고 산업화한 서울의 직접적 영향권 아래에 있어서 민요의 전승력이 약화되었다. 그래서 「노랫가락」 등의 잡가가 풍성하고, 유흥민요화한 「방아찧기노래」와 원래 길쌈노동요로 불리던 「시집살이노래」가 노동과 관련없이 전승되고 있다.
임과 이별하는 설움을 원앙새와 대조시켜 노래한 「연정요(戀情謠)」가 불리는데, “……보리쌍쌍 원앙새는/너의 연분도 부럽구나/만경창파 방을삼고/연화수다가 옷을짓고/이리떠두 둘이나쌍쌍/저리떠두나 둘이나쌍쌍……/이와같이도 슬픈거시/그와같이 슬피나우니/한양천리 먼먼길이/어린선도 앞세우고/주의주의 잘가시고……”와 같다.
「시집살이노래」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길쌈노동요로서 서사민요이다. 이 고장에서 채록된 「시집살이노래」의 내용은 시집을 가서 반찬 장만을 어렵게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시아버지 · 시어머니 · 시누이 그리고 서방님한테까지 구박을 받고, 밭매러 갔던 길에 머리를 깎고 ‘울며 울며’ 중이 되었다는 노래이다.
“……꽃보구리 옆에끼고/꼬초밭에 들어서서/늙은고초 저쳐놓고/애동꼬추 따다가여/게눈같은 참기름에/보글 자글 볶아서루/열두반상 받쳐노니/한접시가 남는구나……/임아임아 서방님아/일어나소 일어나소/동창문에 해돋았오/아침진지 잡수세요/아침진지 잡수시고/서당이나 가옵소서/예라이년 네나먹구개나주구/떨떨이 나가거라……”와 같다.
「방아찧기노래」는 방아찧을 때 부르던 노동요였으나 노동행위가 변화, 소멸했는데도 그 가사의 흥미로 인해 불완전하게나마 전승되고 있다. “찌어라굴러라 찌어보자/얼른○구 밤마실가자……/쌀을랑 찌어다가 맹매질주구/며나릴랑 캐다가 임반찬하세/궁딱궁 떨커덩 찌는방아……”와 같다. 이밖에 잡가인 「노랫가락」 등이 불려지고 있다.
전체 토지의 59.6%가 산지이고 8.58%가 경지에 해당된다. 이 밖에 대지 10.6%, 도로 4.8%, 하천 2.2%이다. 산지가 많은 이곳은 도시화로 경지면적이 계속 줄고 있는데 경지 중 논이 245㏊, 밭이 455㏊이다.
주요 농작물은 쌀 이외에 무 · 배추 · 고추 · 들깨 등이 생산되고 있으나 농산물 생산량이 계속 줄고 있다. 산지가 많은 지역이므로 밤 · 은행 · 대추 등의 임산물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야산이나 구릉지에서는 젖소 · 닭과 같은 목축업도 발달하였다. 농가인구는 전체 인구의 0.89%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0.6%이다.
서울의 위성도시이고 군사도시인 이곳은 1,2차 산업보다는 3차 산업의 비중이 높은 소비도시이다. 그러나 최근 1차, 3차 산업인구는 감소하는 반면 2차 산업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주요 제조업은 섬유공업 · 종이인쇄공업 · 조립금속공업 · 비금속공업 등이다.
상업시설로 대형마트 3개, 백화점 2개, 연쇄점 1개, 일반상설시장 8개 등이 있으며 상업활동이 활발하다. 서비스업 중 접객업 · 유흥업 등이 특히 성황을 이루고 있다.
도로는 국도 3호선이 시의 서쪽을 지나고 국도 39호선이 동북쪽에서 서남∼동북진하여 국도 3호선에 합류하고 국도 43호선이 남양주시에서 동남∼서북진하다가 신곡동에서 동북진하여 포천시으로 들어간다. 서울∼의정부를 연결하는 국도 3호선은 8차선으로 확장되었다.
철도는 경원선이 국도 3호선과 나란히 지나고 교외선이 동북부에서 국도 39호선과 나란히 지나 의정부역에서 합류하고 있다. 경원선 철도가 시의 중심부를 가로지르고 있어 부분적으로 도시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서울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경기도한강 북쪽의 작은 도시로 주변에는 수락산과 도봉산이 의정부를 감싸고 있어 산악관광지가 발달되어 있다. 의정부는 본래 양주땅에 속했던 작은 지방이었으나 1963년 강북지역에서는 하나 뿐인 시로 승격된 곳이다.
특히 서울의 북쪽 머리맡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한성 4진 역할을 하였으며 동두천에서 철원을 지나 원산에 이르는 경원가도와 포천 · 연천쪽으로 연결되는 길이 서로 엇갈리는 길목에 있어 삼거리 길목 노릇을 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서울의 팽창으로 관광기능보다는 위성도시로서의 기능이 더욱 활발한 도시이다. 시가지는 추가령구조곡내에 있어 그 주변에는 수락산유원지 · 흥국사 · 뇌원암 · 수락폭포 · 도봉산유원지 · 망월사 · 송추계곡 · 안골풀장 등 시민의 나들이 관광지가 잘 발달되어 있다.
수락산은 2개 코스로 나누어 산행길이 이루어졌는데 제1관광코스는 서울의 상계동 · 덕릉고개 · 흥국사 ·539봉 · 산정상 · 내원암 · 수락산유원지에 이르는 코스로 족도리바위와 수락폭포를 끼고 능선길을 따라 산행하는 정취는 많은 관광객에게 매력을 주고 있다. 또한 제2코스로는 장수원 · 석림사 · 홈통바위 · 정상 · 남능안부 · 벽운동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능선길을 따라 오르 내리는 정취가 관광객 뿐만 아니라 산악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문화유적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식도락 관광 대상인 부대고기가 유명하다. 또한, 환상의 교외선인 능의선철도가 지나면서 주변 관광지 이용객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