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7년(우왕 3) 이인임(李仁任) 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지윤(池奫)과 김윤승(金允升) 등이 일으킨 난에 연루되어 하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384년 최영(崔瑩)이 조성도감판서(造成都監判書)가 되어 수창궁(壽昌宮)을 경영하였는데, 궁이 낙성되자 왕명을 받아 이를 경하하였다. 그해 10월 왕이 용덕(龍德)의 집에 자주 다니므로 환자 김보(金寶)와 함께 도당(都堂)에서 간하여 이를 고치게 하였다.
같은 해 창왕이 즉위하였는데, 이색(李穡)이 이숭인(李崇仁)과 함께 명나라의 서울에 갔을 때 이숭인이 매매(賣買)한 일로 탄핵을 당하여 유배되자 이색이 글을 올려 퇴관(退官)을 빌고 나오지 않으므로 왕명을 받들고 이색을 존문(存問)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