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7월 23일 충청남도 연기군 출생으로, 호는 심강(心崗)이다. 삼촌이 이범승(李範昇)이다. 1910년 경성수하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4년 경성고등보통학교 본과, 1917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했으며,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 콜롬비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26년 귀국 후, 경성도서관 종로분관의 관장을 맡았고, 1928년부터 1934년까지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원 촉탁으로 일하다, 1934년 화신백화점에 입사하였다. 1936년 화신연쇄점주식회사 감사역에 선임되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상공신문(朝鮮商工新聞)』의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면서, 1937년 경성군사후원연맹(京城軍事後援聯盟)과, 1938년 조선춘추회(朝鮮春秋會)에 참여하였다.
1938년 각종 관변기구와 민간단체를 총망라한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국민정신총동원경성연맹의 상담역을 맡았다. 이후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확대 개편 조직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의 평의원과 1941년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발기인으로도 활동하였다.
해방 후, 대한금융조합연합회 참사, 상공일보 사장, 대한금융조합연합회 회장, 조선상공회의소 상임의원, 협동생명보험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1950년 정치에 입문하여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충청남도 연기군 지역구 무소속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의 여파로 1951년 1월 24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