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시대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당시 종형 완풍군(完豊君) 이서(李曙)는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있으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幽閉)에 분개해 반정(反正)을 모의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서와 서로 지기(志氣)가 맞아 능양군(綾陽君: 뒤의 仁祖)이 있는 곳과 장단 사이를 매일 내왕하면서 거사(擧事)의 연락을 맡았으며, 장단군이 입성할 때 선봉장으로 들어왔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절충장군(折衷將軍)으로 품계가 올라 금군장(禁軍將)이 되었고, 이어 수별장(首別將)이 되었다.
1629년 위원군수로 나갔다가 읍민이 채삼(採蔘)한 사건으로 파직되고, 곧이어 호위별장(扈衛別將)·금군장·오위장(五衛將)·군문천총별장(軍門千摠別將) 등을 지냈다. 그 뒤 1635년 삭주부사로 승진했으나 술취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금군장으로서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했고 다시 어영별장(御營別將)이 되어 남쪽성을 지켰으며, 자원 출전해 적군을 참획(斬獲: 베어 죽이거나 사로 잡음)하는 등 분전사투하였다. 그 공으로 가선(嘉善)으로 품계가 오르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해졌다.
조청화약(朝淸和約) 이후 세자를 호종해 심양(瀋陽)에 갔다가 3년 뒤 신병으로 돌아왔다. 당시 변방이 날로 위태롭고 아버지마저 연로했으므로 자원해 삼척첨사로 나갔다.
1642년(인조 20)에는 장단부사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 때문에 사양하였다. 인품이 기개가 있고 의협심이 강하며 비범한 점이 있었다 한다. 한성부판윤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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