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호는 허당(虛堂). 강원도 영월 출신.
1950년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 3월 동 대학원에서 <≪월인석보≫ 소고 月印釋譜小考>로 문학석사 학위, 1970년 9월 동 대학원에서<≪동국정운연구(東國正韻硏究)≫ 연구> 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강릉상업고등학교·한성고등학교 교사, 1958년부터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1964년부터 1988년 퇴임시까지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리대학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 밖에 경기대학교, 덕성여자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였고, 정년 퇴임 후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학회 활동으로 동악어문학회의 대표이사를 역임하였고, 국어학회 및 국어국문학회의 회원 및 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업적으로는 『훈민정음(訓民正音)』 및 국어한자음, 특히 『동국정운』 연구에 공로가 크며, 30여 편의 논문과 4권 여의 저서가 있다. 국어학 논문으로는 「훈민정음의 제자상 형성문제>(1963), <언문자모 속소위 반절27자의 책정근거>(1973), <훈민정음 창제경위에 대하여>(1974), <국문자모의 두 가지 서열에 대한 해명>(1993), <동국정운 초성자모 23자의 책정과 그 해석>(1993) 외 20여 편이 있다.
저서로는 ≪월인석보저본고(月印釋譜底本考)≫(1958), ≪주해석보상절(注解釋譜詳節)≫(1959), ≪동국정운연구(東國正韻硏究≫연구편·재구편(1970), 공저로 ≪국어학개론(國語學槪論)≫(1965), 편저로 ≪꼭 읽어야 할 국어학논문집≫(1988) 등이 있다.
훈민정음과 관련하여, 국문자모에는 ‘언문(諺文)’과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두 가지 서열이 있는데, 자모자(字母字)는 물론이고 책정 근거도 각각 달라서, 전자는 ≪훈몽자회(訓蒙字會)≫권두의 “諺文字母俗所謂反切二十七字”에 전해지며 ≪예부운략( 禮部韻略)≫을 책정 근거로 삼았고, 후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에 전해지며 ≪동국정운(東國正韻)≫을 근거로 하여 책정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세종 25년 12월에 ‘諺文二十七字(세종실록에는 28자)’가 창제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세종 26년 2월 16일부터 “以諺文譯韻會”하여 91운 23자모체계(‘ㆆ’자 추가)로 개편한 운서인 ≪동국정운≫을 근거로 세종 28년 9월 상한에 “훈민정음”(28자)이라 개칭하여 반포하였다는 견해가 이목을 끈다.
특히 임금 사후에 편찬되는 실록 기록만을 의지하는 기존 논의들과는 달리, 선행 연구들에서 등한시하고 있는 자모와 운서의 관계, 운서 편찬의 내역, 자모자의 선정 원리 및 책정 내력 등 근본적인 여러 가지 내적 사실을 성운학(聲韻學)의 기초 위에서 면밀하게 밝힌 점이 특기할 만하다.
≪동국정운연구≫는, 훈민정음과 함께 세종의 위업의 하나인 ≪동국정운≫에 대한 연구서로서, 연구편·재구편의 2권으로 되어 있다. 연구편에서는 주로 재구의 이론적 근거와 성운학·등운학적 분석에 의해 훈민정음 자모자의 책정근거를 밝혔다.
재구편에서는 연구편에 의거하여 현전(1970년 당시) 원본 권1, 권6의 체재를 따라 낙질된 원본 권 2○3○4○5를 재구 보완하되, 한자음을 편리하게 찾을 수 있도록 사성(四聲)별로 행을 달리하여 원본의 체재를 개편하였다.
원본 권1○권6의 오류는 물론 집운(集韻)과 운회(韻會)의 중국판, 국내판별로 가려 자형(字形)의 이동(異同)까지를 난외에 지적함으로써 완벽에 가까운 원본의 재구를 이룩하였다. 이 후 1972년 벽두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의 전질이 발견됨으로써, 연구 방법의 타당성과 정밀성, 그리고 재구의 완벽성이 학계에 검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