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이칭
입부(立夫)
시호
무의(武毅)
이칭
완산군(完山君), 완천군(完川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4년(명종 9)
사망 연도
1611년(광해군 3)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온성판관|의주판관|전라도병마절도사|첨지중추부사
관련 사건
임진왜란|노량해전
정의
조선시대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입부(立夫). 종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증도정 이윤의(李允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이귀달(李貴達)이다. 아버지는 이진(李眞)이며, 어머니는 진사 구수(龜壽)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온성판관·의주판관 등을 거쳐 일시 귀가했다가 혜산진첨절제사(惠山鎭僉節制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방답진첨절제사(防踏鎭僉節制使)로서 이순신(李舜臣) 막하에서 중위장(中衛將)으로 옥포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다. 그 뒤로는 전부장(前部將)으로서 항상 선봉이 되어 당항포(唐項浦)·한산(閑山)·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 뒤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로 좌천되어 1년간 있다가 유도방위대장(留都防衛大將)·전주부윤·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1598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노량해전(露梁海戰)에 참전해,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총환에 맞아 전사하자 조선 수군을 지휘해 개선하였다.

이듬 해 포도대장으로서 무고한 사람을 장살해 파직되었다가 1600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복귀하였다. 이듬 해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재물을 탐냈다 하여 파직, 다시 수원부사로 임용되었으나 또 파직되었다. 1602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또다시 파직되는 등 여러 번에 걸쳐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604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 해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1606년 다시 수원부사를 거쳐 이듬 해 완천군(完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광해군 때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인조 때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기언별집(記言別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신장초(壬辰狀草)』
집필자
조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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