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경기도 양주 출생. 이해석(李海石)의 둘째딸이다. 16세 때 신정왕후(神貞王后:趙大妃)의 조카인 조영하(趙寧夏)와 혼인하였다.
이정숙은 1875년에 정부인(貞夫人)에서 정2품 이상의 관직부인에게 주어지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호칭을 받았다. 남편인 조영하가 1863년 과거에 급제한 뒤 호조판서·훈련대장·병조판서·도통사 등을 지내고 예조판서로 있던 중, 1884년 갑신정변 때 피살되었다. 1906년 1월 엄황귀비(嚴皇貴妃)가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여 총재를 맡았을 때 회장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6월 엄황귀비의 후원을 받아 종로구 수송동에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 지금의 숙명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에 취임하였다. 일일이 가정방문을 하여 여성의 신교육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 양가자녀를 기숙사에 입학시켜 학비와 기숙사비 등을 받지 않고 무료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4년 이후에는 우수한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등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여 졸업생에게도 장학금을 지급, 매년 일본의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와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奈良女子高等師範學校] 등에 진학을 시켰다.
1924년에 학무국으로부터 교육공로 표창을 받았으며, 1927년 동아일보사로부터 민간교육 공로자로 선정되어 은배(銀杯)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여자교육 보급진작의 공로로 다시 학무국으로부터 은배를 받았다.
1935년 임종 직전에 퇴직금 전액을 학교법인 숙명학원(淑明學院)에 장학기금으로 희사하였다. 현재까지도 제자 및 졸업생들의 협찬으로 이정숙 장학회가 계속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