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택

  • 종교·철학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후기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 덕봉(德峯)
  • 양중(養重)
인물/전통 인물
  • 본관경주(慶州)
  • 사망 연도1805년(순조 5)
  • 성별남성
  • 주요 관직병조좌랑|사헌부지평|장령
  • 출생 연도1738년(영조 14)
  • 출생지경주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능하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 한학)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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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중(養重), 호는 덕봉(德峯). 경주 출신. 아버지는 이운배(李雲培)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남국망(南國望)의 딸이다. 이진원(李晉遠)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8세 때 닭싸움을 보고 “상앙의 법률로 논죄할 것 같으면, 이 닭은 당장 삶아 먹을 것을(若論商鞅法 此難當烹食)……”이라는 글을 지어 선생을 놀라게 하였다. 1780년(정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성균전적·예조정랑·사헌부감찰·병조좌랑·사헌부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이진택은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가 사도세자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주장한 사람이다. 또, 1793년 이진택이 대간으로 있을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주장한 상소를 올려 사노혁파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개혁론의 여파로 1801년(순조 1)에는 공노비 해방을 보게 되었다.

한때, 정조의 신임을 크게 받았으나 관운이 좋지 않았다. 1802년 서유방(徐有防) 등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삼수로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났고, 그 다음 해에 죽었다. 저서로는 『덕봉문집(德峯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덕봉문집(德峯文集)』

  • -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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