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방 이후 「학살」·「자화상」·「풍경」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945년 광복 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 결성에 참여하였고,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등과는 거리를 두면서 화가로서의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이 시기의 활동은 주로 학교 미술실에서 과일이나 꽃 등의 수채화와 유화 소품을 그리는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1951년에 제작한 「학살」은 무고한 양민의 살육현장을 그려 6․25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1954년 김종하(金鍾夏)·변희천(邊熙天)과의 3인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958년부터 1959년까지 ‘한국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표방한 신조형파전(新造型派展)에 참가하였고, 이 무렵부터 추상표현주의의 작품세계로 전향하였다. 또,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추상작품들을 출품하였고, 1962년부터 1969년까지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들이 조직한 신기회전(新紀會展)에만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이듬해 작고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이철이』(이철이화집간행위원회, 1991)
- 「이철이의 한계와 재평가의 측면」(이구열, 『이철이유작전』, 1993)
- 국립현대미술관(www.moc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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