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초명은 업(업). 자는 자신(子愼), 호는 석촌(石村). 나주 출생. 임평(林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붕(林鵬)이고, 아버지는 정자 임복(林復)이며, 어머니는 서열(徐說)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에 뽑히고, 1601년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다가 성균관전적에 승진하고, 이어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안핵사·무장현감 등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병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지평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였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자 그는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좌천되고, 이어 덕원군수로 나갔다가 파직되었다.
1612년 봉산군수가 되고 이어 승지 등을 역임하다가,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21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다시 고향에 내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안동부사가 되고, 이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쌓였던 폐단을 일소하고 농업의 권장과 군사의 조련 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적을 토벌하는 한편, 군량을 보급하는 등 열성을 다하여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되고 임기가 만료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 저서로 『석촌유고』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