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0월 원호처의 승인을 받아 설립되었다. 1946년 이후부터 친북한 단체인 조총련계에 대항하여 반공투쟁을 계속해오던 거류민단하의 학도 및 청년들은 1950년 6월 북한군이 불법남침하자 일본 각지에서 궐기하여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한편, 당시 극동지구 총사령관 맥아더(MacArthur,D.S.)에게 참전할 수 있도록 편의제공을 요청한바 1차 확답을 듣지 못하던 중 전황은 불리하게 전개되어 낙동강까지 후퇴, 재차 조국전선에 참전할 것을 요청하였다.
1950년 9월 초 미국군 제1기 병사단과 제3사단에 입대, 초보적인 군사훈련을 마친 641명 중 1, 2진 280명은 선봉이 되어 유엔군과 함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가하였으며, 이어서 3진과 4·5진까지 참전하여 각 전선에서 북한공산군과 싸웠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후 출전 당초의 의의를 살린다는 취지 아래 3·1대대(323명)를 창설하였다. 그 뒤 200명이 국군에 편입되었는데 그 중 30명은 육군종합학교에 입교, 초급장교로서 복무하였으며, 일본군 조종사 유경험자는 조종장교로 임관되었다.
또한, 1·4후퇴 때 일본으로 귀환한 의용군 중 58명은 재차 조국전선에 참가하기 위하여 1951년 2월에 재입국, 하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각 부대로 배속되었으며, 의용군 641명이 각종 주요 작전에 참가하여 전사자 60명, 실종자 87명 등 147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1951년 초에 미군 및 국군에서 제대해 온 회원의 일본 귀환대기 및 권익보호를 위하여 부산시 동구 초량동 소림사에 재일한교학도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그 해 10월에 국립정양원에서 전원 수용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1952년 5월 샌프란시스코 미·일강화조약체결로 일본으로 귀환업무가 중단되었다.
참전자 641명 중 희생자 147명, 일본귀환 268명, 본국 잔류 226명으로 확정되어 1954년 9월에 본부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34번지로 이전, 친목 및 반공단체로서 정양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7년 4월 재일연예인을 초청하여 국내연예인과 협조, 일선장병위문공연을 가졌고, 1958년 9월 재일연예인 10명을 초청, 각 군과 병원을 위문하였다.
1958년 9월에는 치안국 특정과의 요청으로 재일교포 북송저지공작원에 41명이 응모, 일본에 밀파 도중 선박전복으로 7명이 희생되고 나머지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간접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58년 12월 10일 동경 시나가와(品川)역에서 제1차 북송자 저지실력행사를 비롯하여 니가타현(新瀉縣) 근교의 오기가와역과 니가타역에서 선로상 연좌저지 실력행사로 일본경찰과 충돌하여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 저지운동을 전개하였다.
1960년 4·19혁명으로 본국에 송환 도중 24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미결 3개월, 실형 6개월 등 모두 15개월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1961년 6월 귀국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사회단체해산령에 의하여 해산되고 원호대상자로 확정, 취업알선을 받게 되었으며 조국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1966년 10월과 1980년 10월 2회에 걸쳐 재일거류민단장으로부터 전회원에게 공로표창장이 수여된 바 있다.
1967년 1월에는 전회원에게 무공포장이 수여되었고, 1973년 6월 재일거류민단의 성금으로 국립묘지 제11묘역에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위령비가 건립되었다.
1979년 6월에는 인천 수봉공원에 재일거류민단 및 교포들의 성금과 정부지원으로 재일학도의용군참전기념비 건립을 기공, 1979년 10월에 준공하였으며, 1982년 11월에는 경내에 연혁 및 명비가 건립되었다.
1982년 6월부터 특히 6·25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애국애족과 호국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자매단체인 대한상이군경회와 광복회의 협조하에 전국의 중고등학교·대학교·예비군과 기타 특수기관에 대한 호국의식 계도강연을 계속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