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병원은 대한적십자사와 그 출발을 거의 같이하고 있다. 즉, 1905년 10월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됨과 동시에 적십자병원도 창립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적십자사 본사와 병원이 별개로 독립된 기관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적십자사 자체가 곧 병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인적구성을 보면, 사장 1명, 부사장 1명, 의원(醫員) 3명, 약제사 1명, 약국조수 3명, 회계 1명, 간호부장 1명, 간호부 3명, 통역 2명으로 되어 있다. 위치는 당시 북서영추문(北署迎秋門:지금의 경복궁 후문) 밖에 있었으며, 1906년 10월 다시 지금의 원남동 남쪽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적십자사가 그 규칙에 따라 환자를 치료한 것은 분명하나 그 규모는 기록이 없어 살필 수 없다.
다만 1906년 2월 12일자의 ≪황성신문≫에 게재된 <대한국적십자사공포취지서 大韓國赤十字社公布趣旨書>를 보면, 적십자 창립 이전인 1905년 9월에 이미 “……9월 15일부터 환자를 치료하여 ……남녀노소 치료에 수가 781인에 달하였으니……”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대한적십자사 창립 후에는 더욱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한국적십자사공포취지서>에는 창설 당시 고종이 적십자병원 건축비로 2만 환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돈으로 얼마 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어떤 형태의 병원을 건축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창설 초기 적십자사가 병원업무를 동시에 수행하였던 기간은 1909년 7월 대한국적십자사 관제를 폐지하고 일본적십자사와 병합됨으로써 대한적십자사의 명칭이 없어졌을 때까지로 볼 수 있으며 병원사업만은 그대로 일본적십자사 한국본부의 소속으로 존속하여 왔으니 현 서울적십자병원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겠다.
1906년 10월 8일자 ≪황성신문≫에 “북서영추문외(北署迎秋門外)에 재(在)한 적십자병원을 호동근지(壺洞近地)로 확정하고 건축지단(建築地段)을 매수(買收)하여 방금시역(方今始役)하는데 의학교(醫學校) 광제원(廣濟院)을 해사(該社)로 합설(合設)한다더라.”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설립 후 얼마 동안 있다가 영추문 밖에 한옥으로 된 적십자병원을 건축하고 여기에서 진료업무를 해오다가 사업을 더욱 확장할 필요가 생겨 광제원을 합설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의료 부분의 사업을 확장하여가다가 1907년 3월에는 현재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에 있던 대한의원으로 하여금 광제원을 병합하게 하여 적십자병원업무를 맡도록 하였다. 1907년의 칙령 제9호 <대한의원 관제> 제13조에 보면, “대한의원은 대한국적십자사의 촉탁(囑託)을 수(受)하여 해병원(該病院)에 속(屬)하는 일체(一切)의 사무을 장(掌)함이라.”고 명시하였다.
이 대한의원은 종전에 광제원·관립경성의학교 및 적십자병원을 폐합하여 만든 것으로 그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적십자병원이라는 이름이 없었을 뿐이지 사실상 적십자의료기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시대의 적십자병원은 이렇게 운영되어오다가 1909년 7월 대한적십자사가 폐지되고 일본적십자사 한국본부에 폐합됨에 따라 그 기능이 정지되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된 뒤 일제는 종전의 일본적십자사 한국본부 명칭을 그해 12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 바꾸었다. 당시 일제로서는 우리 나라 국민에 대한 의료사업은 관심 밖이었다. 단지, 형식을 갖추기 위하여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1923년 12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상설진료소라는 것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의료사업을 해오다가 1926년 3월 현재의 서울적십자병원 북쪽에 2층 건물을 지어 의료시설을 옮기고 일적조선본부적십자병원(日赤朝鮮本部赤十字病院)이라고 하였다. 조선본부적십자병원은 다시 1933년 조선적십자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는 중국침략을 감행하면서 일본군을 위한 의료시설의 확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적십자병원도 확장할 필요를 느껴 서울적십자병원 건물을 새로 짓게 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 공사비 28만 9,650원을 들여 1937년 12월에 준공되었다. 그 뒤 일본적십자사는 1942년 종합병원으로서 근대적 의료시설을 갖춘 이 병원의 명칭을 경성적십자병원이라 개칭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자 일본적십자사의 활동도 종말을 고하였다. 같은 해 9월 8일 미국군인이 서울에 진주함과 동시에 경성적십자병원을 접수하였다.
당시 경성적십자병원의 우리 나라 직원은 모두 97명이었는데 의사 17명, 약제원 3명, 사무원 8명, 간호원 20명, 기타 49명이었다. 진료과로는 내과·외과·소아과·피부비뇨기과·산부인과·이비인후과·안과·치과·방사선과 등 9개과였고 입원실 병상수는 220개였다.
미국적십자사 직원에 의하여 접수된 경성적십자병원은 곧 그 명칭을 서울적십자병원으로 개칭하여 대한적십자사가 재조직될 때까지 혼란한 사회정세 속에서도 그 한 해 동안 입원환자 2,400명으로 연인원 4만여 명과 외래환자 연 14만여 명을 진료하였다. 당시 우수한 의료진을 확보하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수련의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의료요원 및 간호원의 자질향상 등을 도모하여 종합병원으로서의 지도적 위치에서 국내 다른 병원의 선봉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응급실을 설치하여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를 돌보는 외에 긴급한 의료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49년 4월 <대한적십자사조직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공포, 시행됨으로써 대한적십자사 서울적십자병원으로 특별한 변화 없이 의료사업을 계속해왔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일시 공산군이 침입하여 공산군 부상자 치료시설에 징발당한 일도 있었다.
그 해 9월 28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흩어졌던 의료진이 다시 모여 응급진료반을 편성하여 병원 부근과 금촌 방면의 많은 피난민 환자를 무료진료하였으며 중환자는 병원에 입원가료하게 하는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적십자의료사업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다음해 1951년 1·4후퇴시에는 제주도로 피난가서 제주도 서귀포에 남양호텔을 개수하여 1951년 2월 5일 적십자피난병원을 개원하였다. 적십자피난병원은 난민환자치료는 물론 도내 모슬포 소재 제1훈련소의 국군환자도 진료하는 한편 순회진료반을 편성, 방역사업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953년 7월 13일 수복으로 이곳을 떠날 때까지 도합 53만여 명의 환자를 무료진료하였다.
적십자병원은 대한적십자사에서 설치, 운영하는 병원으로 일반병원과 같은 업무 외에 순회진료, 재해시 긴급의료활동, 전시상병자의 구휼사업, 기타 국민보건향상을 위하는 부대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 세계 130개국의 적십자사 중 병원사업을 하고 있는 적십자사는 그리 많지 않다.
1998년 5월 당시 대한적십자사에서 서울적십자병원 외에 인천적십자병원·대구적십자병원·상주적십자병원·거창적십자병원·통영적십자병원 등을 운영하였으나 2010년 3월 대구적십자병원은 폐원하였다. 2017년 현재 서울적십자병원을 비롯해 인천적십자병원ㆍ상주적십자병원ㆍ통영적십자병원ㆍ거창적십자병원ㆍ경인의료재활센터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2018년에 영주적십자병원이 개원하였다.
1980년대 이후 민간의료시설이 공공의료가 차지하던 역할을 떠맡고, 특히 1989년부터 국민개인보험이 실시되면서 적십자병원의 특색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의료계의 환경변화에 대처하면서 적십자병원은 일반환자를 진료하는 외에 민간의료기관에서 기피하는 행려·구호·보호·산재 환자 등 소외 및 빈민계층환자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서울적십자병원의 경우 1998년 말 당시 480병상의 규모에 의사 110명, 약사 13명, 간호사 164명 등 직원이 634명이었고, 1997년 말 기준 연입원환자는 14만 1,485명이었으며, 연외래환자수는 22만 2,953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