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해전에서 옥포·합포에 이어 세번째로 왜군을 무찌른 싸움이다. 적진포의 위치는 종래에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적덕리 일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춘원포(春元浦: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황리 사이 안정만), 당항포(唐項浦: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당동만(塘洞灣: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구당마을), 남촌진(南村鎭: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화당리), 신용리(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신용리 상원·하원 부근), 적포(赤浦: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전도마을 적포만)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으며, 대체적으로 경상남도 고성군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5월 4일 본영인 여수를 출항한 이순신은 당포(唐浦 : 현재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옥포·합포 등지에서 모두 31척의 일본수군을 분파(焚破)하고 8일 남포(藍浦: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귀산면 남포리) 앞바다에 이르러 휴식하던 중 고리량(古里梁)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순신은 즉시 모든 전선을 둘로 나누어 여러 섬과 섬 사이를 수색하면서 돼지섬[猪島]을 지나 적진포 앞바다에서 왜선 13척을 발견하였다. 그때 왜적은 병선들을 포구에 한줄로 매어두고 대부분 상륙하여 재물을 탈취하던 중 아군의 위용 앞에 당황하여 산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순신의 명령으로 낙안군수 신호(申浩),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등 여러 장령(將領)과 군사들이 포구로 돌진하여 대선 9척, 중선 2척 등 모두 11척을 분파하자 왜적의 일부는 육지로 도망쳤다. 임진왜란 후 수군의 1차출동으로 옥포·합포·적진포해전에서 승리하자 왜적과의 싸움에 자신을 가지게 되어 이 후의 작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