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응칠(應七). 호는 운암(雲巖). 장흥 출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정철주(鄭哲周)이며, 어머니는 영광김씨(靈光金氏)로 김희(金희)의 딸이다. 처음 최상관(崔相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항로(李恒老)를 사사하였다.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곧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887년 사헌부지평이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 것을 청하고, 죄와 상을 분명히 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울 것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종묘대제(宗廟大祭)에 대축관(大祝官)과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었다.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 등을 올려 정치도의를 바로잡을 것, 매관(賣官)의 폐단을 없앨 것, 직언을 받아들여 언로를 개방할 것 등을 촉구하였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저서로는 『운암집(雲巖集)』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