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분야는 치민(治民)·치병(治兵)에 필요한 정치·경제·재정·국방(병사)·병술·의약·기계·산업(농업) 등의 각 방면에 걸쳤고, 일상생활의 전반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 아들 항령(恒齡)의 공으로 인하여 첨지중추부사가 제수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전국을 답사하여 역대 국경 변천의 역사지리학적인 검토를 꾀하였다.
즉, 군현(郡縣)의 연혁, 산천도리(山川道里), 관방(關防)의 성곽, 해로(海路), 북간도강계(北間島疆界), 궁실(宮室) 등에 관한 역사적 변천을 밝혔다. 특히, 산천에 대하여서는 다분히 자연지리학적 관점에서 서술하였고, 정치적 관점을 벗어난 근대적인 관점을 잘 나타내었다.
그는 지도 제작에 있어 과학적인 백리척(百里尺)을 이용한 축척법을 사용한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즉, 1척을 100리로, 1촌을 10리로 기준하여 계산한 축척법에 의거하여 세밀한 대축척지도의 제작에서 정확성을 높임으로써 크게 공헌하였다.
그가 제작한 ≪동국지도 東國地圖≫에 대하여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정상기가 처음으로 백리척을 축척으로 써서 지도를 그렸고, 또 가장 정확하다.”고 찬탄하였다.
영조 때의 대지리학자인 신경준(申景濬)도 “척량촌탁(尺量寸度)에 의한 정밀한 지도는 정상기가 처음으로 만들었다.”(동국여지도 발문)고 하고,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동국여지도 東國輿地圖≫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음을 기록하고 있다(동국여지도 발문).
그의 지도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축척이 밝혀진 지도일 뿐만 아니라, 도별도를 이으면 전국도가 되도록 동일 축척에 의하여 고안·표현되었다. 또, 수륙 교통로와 통신망의 표현, 산맥의 보다 명확한 표현,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도별 채색 등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아들 항령 역시 지도 제작을 계승하여 수보윤색(修補潤色)하였고, 항령의 아들 원림(元霖)도 정조 때 왕의 특명으로 ≪여지고 輿地考≫를 수보한 바 있다. 여러 대에 걸쳐 지도 제작에 힘써 조선 시대의 지도 제작 사상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인자비감 人子備鑑≫·≪농포문답 農圃問答≫·≪심의설 深衣說≫·≪도령편 鞱鈴篇≫·≪향거요람 鄕居要覽≫·≪치군요람 治郡要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