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월성 출신. 1923년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군사선전위원장(軍事宣傳委員長) 김창숙(金昌淑)을 상면(相面)하여 만몽지방(滿蒙地方) 황무지를 개간하고 그 이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둔전병제(屯田兵制)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하고, 그 방책으로 소요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5년 8월 대구에서 김화식(金華植)에게 김창숙의 취지문을 보여주고 협력을 요청한 뒤, 경성(京城) 남산공원 등지에서 손후익(孫厚翼)·이재락(李在洛)·김동진(金東鎭)과 여러 차례 모의한 결과, 모금목적을 조기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역을 분담하기로 하고 안동·영주·봉화지방의 부호들을 상대로 모금활동을 하였다. 1927년 4월 30일 일본경찰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