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수호통상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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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1884년(고종 21)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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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84년(고종 21)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조약.
내용

18세기에 조선과 러시아는 북경(北京)에서 접촉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양국간의 접촉이 빈번해진 것은 1860년(철종 11) 이후였다.

1860년의 청로북경조약(淸露北京條約)에 의해 비로소 조선은 러시아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북경조약 체결 후 연해주(沿海州) 지방을 점령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860∼1870년대에 프랑스 · 미국 · 일본 및 영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조선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지 않았다. 조선이 개항할 경우 산업화에 뒤진 러시아는 서구 국가들과 경쟁하기는어려웠으므로 조선에서의 현상 유지를 원했기 때문이다.

1871년 미국의 로저스(Rodgers, J.)제독의 조선 원정때도 러시아정부는 미국과 공동 보조를 취하기를 거절하였다.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에도 러시아정부는 사태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1880년대에 들어서자 영국은 자국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조선에서 종주국인 청나라가 우위권을 장악하는 것이 극동에서 러시아 세력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영국은 청나라를 설득해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이 서구 국가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하려 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가 조선과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주선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서양 세력의 조선 침투를 바람직하게 보지 않았다.

서방 국가들이 조선의 전략적 위치를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이용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경제적 · 군사적으로 뒤진 제정러시아는 청나라가 조선에서 종주권을 행사해 서양 세력을 견제하기를 원하였다.

1881년 8월 조선과의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슈펠트(Shufeldt, R. W.)제독이 청나라에 왔을 때, 러시아는 북경주재대리대사 코얀데르를 통해 미국의 조선 침투는 일본의 침략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또한 서양세력의 조선 침투는 조선 내에서의 청의 세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권고하였다.

1882년 5월 슈펠트조약의 체결이 거의 확실해 졌을 때 러시아정부는 북경에 있는 대리대사 뷰초프에게 직접 혹은 청의 중재로 조선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지 타진하였다. 뷰초프는 청의 도움 없이는 조약 체결은 어려울 것이라고 회답하였다.

이홍장(李鴻章)의 중재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 제정러시아정부도 청의 대표 마건상(馬建常)을 통해 조선과 수교할 의사를 전달하였다. 슈펠트조약과 비슷한 조약을 러시아도 원했으나 동시에 육로통상을 원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러시아와의 국경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육로통상을 조약에 명시하기를 거절하였다. 1882년 7월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하기 위해 톈진(天津) 주재 베베르(Veber, C.)영사를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했으나 임오군란의 발발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하기를 자제했고 조선도 청 · 일본 및 영국에 의해 고취된 러시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조선이 영국과 수교하는 경우 러시아에 대한 공격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조선의 개방을 반대해 왔다. 그러나 끝내 저지할 수는 없었다.

1870년대 말에 이리(伊犁 : 터키스탄)분쟁으로 인해 청 · 러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홍장은 주일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을 시켜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써서 김홍집(金弘集)을 통해 조선정부에 전달하게 하였다.

황준헌은 이 소책자에서 조선은 ‘친청국 결일본 연미국(親淸國 結日本 聯美國)’하고 구미열강과 수교하면 조선도 벨기에와 같이 독립을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기 일보 직전에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 결과 1880년대 초부터 조선은 러시아를 두려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오군란 발발 이후 청나라가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면서 러시아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변하기 시작하였다. 1882년 10월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조선에게 강요해 조선을 청나라의 명문화된 속국으로 삼으려 했고, 치외법권 적용과 경제적 진출을 도모하였다. 청나라 상민의 조선 거주와 여행이 자유롭게 되자 조선 상민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되어 반청의식이 고조되었다.

동시에 청나라는 톈진주재독일영사를 지낸 묄렌도르프(Mollendorff, P. G.)를 서울로 파견해 조선의 재정 및 외교권을 지배하게 하였다. 그 해 말 그는 마건상과 더불어 조선에 도착해 외무차관으로 임명되어 외교를 담당했고, 1883년 봄에는 해관총세사(海關總稅司)에도 임명되어 재정권을 장가하였다.

묄렌도르프는 조선 사신 자격으로 톈진과 일본을 내왕하면서 이홍장의 의도대로 일본의 세력이 조선으로 팽창하는 것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 정부는 청나라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제3국을 개입시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또한, 묄렌도르프도 처음부터 조선은 청나라가 아닌 다른 강대국에 의지해야 된다고 보고 그러한 나라는 러시아뿐이라고 생각했다. 청나라와 일본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해 계속 언급했지만 고종은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기를 희망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사죄사절로 일본에 간 김옥균(金玉均) · 박영효(朴泳孝) · 민영익(閔泳翊)은 주일러시아공사관 로젠(Rosen, R.) 서기를 방문하였다. 여기서 청나라의 지나친 내정 간섭을 분개하면서,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서구 세력, 특히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해 자주독립을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러시아정부에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1883년 말과 1884년 초 사이에 김옥균은 다시 한번 주일러시아공사 다뷔도프(Davydov, A. P.)에게 조선의 자주독립을 강화하기 위해 러시아와 우호조약을 체결하기를 희망한다고 전하였다.

1884년 초에 고종이 개인적으로 김관선을 노보키예프스코 (Novokievskoe)에 파견해 변방행정관인 마튜닌(Matiunin, N. G.)에게 조선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배제하고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희망한다고 전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 정부는 조선이 청나라의 세력을 제거하고 러시아의 지지를 받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82·1883년에 러시아는 서구의 조선 침투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884년까지도 러시아 정부는 조청종주관계(朝淸宗主關係)가 외국 침략을 막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다. 청나라의 후견인 영국은 조선을 개방하려고 한 반면, 러시아는 조선을 청나라의 보호 하에 두려고 하였다.

1883년 여름 러시아는 조영조약(朝英條約) · 조독조약(朝獨條約)의 비준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조미수호조약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하려고 하였다. 1884년 초 러시아 정부는 톈진주재러시아영사 베베르에게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지시하였다.

기어스(Giers N. K.) 외상은 청나라의 참여없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베베르에게 지시하였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조로육로통상조약(朝露陸路通商條約)을 연기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같은 해 5월 프랑스가 북베트남(통킹) 지역을 점령하자 청 · 프랑스전쟁이 발발할 것을 예측하고 조선과의 수교를 서둘렀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청나라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베르는 이홍장의 추천으로 그 해 6월 2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7월 7일 조로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통상조약은 조영 · 조독조약과 거의 같았고 인천 · 원산 및 부산이 개방되었다. 그러나 상선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러시아로서는 해상 무역은 무의미하였다. 오히려 양국간의 조약 체결로 국경을 통해 러시아가 수입하던 소와 식료품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1888년에 가서야 조로육로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체결 결과 다른 나라와는 대조적으로 러시아는 일거에 청 · 일본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선에 군림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 · 미국 등과 나란히 조선의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 청 · 조선에 이르는 지역에서 러시아와 대치하고 있었던 영국은 러시아와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위험시하였다. 묄렌도르프는 톈진으로 소환되어 이홍장으로부터 조로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주선한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였다.

묄렌도르프는 서울에 돌아오기 전에 북경에 들러 러시아 군사요원인 시네우르(Shneur) 대령을 만났다. 여기서 그는 러시아가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어 다른 열강으로부터 보호하지 않는다면 조선이 영국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시사하였다.

같은 해 9월에 묄렌도르프는 즈푸(芝芣)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 군함의 크라운(Croun) 해군소장을 만나 영국이 거문도를 임대해 주는 대가로 조선을 보호하겠다고 하니, 러시아가 영국 · 일본과 공동으로 조선을 보호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나 쉬네우르 대령과 크라운 소장은 묄렌도르프에게 러시아정부와 직접 교섭하도록 충고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과의 충돌을 잘 알고 있는 묄렌도르프는 어떻게 해서든지 러시아를 조선으로 끌어들여 열강의 세력균형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청과 조선으로 인해 열강들과 반목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서울에 주둔한 청 · 일 양군의 대항기세는 날로 격화되고 있어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몰랐다. 만일 청 · 일 양국이 개전하게 된다면 가장 난처한 나라는 조선이었다.

고종과 척신들은 사태를 신중히 논의하면서 제3국인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고자 하였다. 고종과 척신들이 친로노선을 채택한 데는 러시아만이 조선을 보호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 묄렌도르프와 친로파인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한규직(韓圭稷)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이다. 1885년의 친로밀약사건도 친로수호조약 체결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참고문헌

『The Russo-Japanese Rivalry over Korea 1876∼1904』(신승권, 육법사, 1981)
『동양외교사』(김경창, 집문당, 1982)
Rossiia : Koreia(Boris, D. P., Moscow Nauka, 1979)
「조로수교의 배경과 경위」(최문형, 『한노관계 100년사』, 한국사연구협의회, 1984)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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