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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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개념
선박을 설계하고 건조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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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선박을 설계하고 건조하는 학문.
내용

우리 나라의 조선공학 분야는 광복이 되었을 때 겨우 부산 대한조선공사, 진해 해군공작창, 인천 조선중기공작소의 세 곳이었는데, 그나마 미약한 시설과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인천 조선중기공작소에 근무하며 일본의 소형잠수정설계에 참여하였던 김재근(金在瑾)이 주동이 되어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몇 대학에 조선공학과를 설치함으로써 우리 나라 조선공학교육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 뒤 1970년대 초 현대조선소가 생기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조선공학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연구원이 처음으로 생겨 실절적인 연구활동이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에 있어 조선공학 교육은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으며, 이어 1947년에는 해양대학에서 시작되었으나 2회의 졸업생만을 배출하고 폐지되었다.

1950년에는 부산 수산대학에서 시작하였으나 1963년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편입되었으며, 1954년에는 인하공과대학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술인력을 배출하여 오늘의 조선공업에 밑거름이 되어오고 있다.

이에 더하여 1982년부터 충남대학교와 한국해양대학에서도 조선공학 또는 선박공학 교육과정이 설치되었다. 1988년 현재 5개 대학교에서 244명이 졸업하였으며, 1,996명이 재학중이다.

한편, 조선공학 학술활동의 모체가 되어오고 있는 대한조선학회는 비교적 빠르게 6·25전쟁 중인 1952년 11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조선·해운 등 관계기술인사들이 모여 창립하였으나 1960년 6월 이후부터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는 등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리고 선박의 안전을 위한 기술활동을 담당하는 한국선급협회는 1960년 6월에 창설되어 활동하면서 입급(入級) 선박의 검사는 물론 정부대행검사를 통하여 우리 나라 선박의 질을 높이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해왔다.

한편, 조선공학 분야에 관한 전문연구는 1968년 10월 김훈철(金燻喆)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조선해양기술연구실이 설치되면서 시작된 것으로서, 이 연구실이 발전하여 1973년 10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 선박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는 또 1976년 11월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선박연구소로 독립하여 대덕연구단지에 설치되었고, 1981년 1월 한국기계연구소로 통합되어 현재 200여명이 조선공학 분야의 연구를 꾸준히 수행하여오고 있다.

이 연구소는 선박의 모형으로 성능을 시험하는 심수대형수조(深水大型水槽)를 비롯하여 프로펠러를 시험하는 공동수조(空洞水槽), 각종 선박용기관 및 부품을 시험하는 연구설비 등 각종 선박연구설비들을 갖추고 있다.

또한, 1980년대에 들어 (주)현대중공업과 (주)대우조선공업 등의 대형조선소에서도 연구활동에 박차를 가하여 부설연구소가 설치되었으며, (주)현대중공업에서는 울산조선소에 심수대형수조설비를 확보중에 있다.

1960년대 이전의 상선(商船) 설계기술은 소형 선박에 국한된 것이었으나 정부의 조선공업육성의지가 담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1960년대 전반에 국제적인 선급협회(船級協會)의 인정을 받은 중형선의 설계가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즉, 1963년에 대한조선공사의 설계진은 총 톤수 1,600t급 화물선과 총 톤수 2,600t급 석탄운반선의 설계를 개발하여 미국선급협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우리 나라 설계기술의 국제수준을 향한 발돋움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1965년에 상공부는 대한조선학회에 표준형선의 설계를 의뢰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한조선학회는 대한조선공사, 한국해사기술사, 한국선급협회, 조선공학과가 설치되어 있는 각 대학 등 각 분야의 기술진의 협력을 얻어 1971년까지 7년간 60여 종의 중소형 각종 표준형 선박의 기본 설계도서를 개발하였다.

이 설계도서는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건조된 중소형 선박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수출선의 주종을 이루는 대형상선의 설계는 거의 외국으로부터의 도입에 의존하여 왔으며, 현대조선소·대한조선공사 등이 자체설계능력을 갖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자기 회사 건조선박 중 2만∼3만 톤급 화물선의 설계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현재 일반적인 상선의 설계는 우리 나라에서 수행되고 있다. 한편, 해상경비 및 방위를 위한 쾌속선박의 개발은 해외에 의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아 일찍부터 우리 나라 기술자들에 의하여 수행되기 시작하였는데, 1965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김재근에 의하여 설계된 100t 25노트급 경비정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 한국해사기술사의 설계진에 의하여 60급 경비정이 뒤를 이었으나 본격적인 쾌속정의 면모를 갖춘 선박의 출현은 1970년부터 2년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조선해양기술연구실이 중심이 되어 개발한 ‘어로지도선’이라는 이름을 갖춘 40노트급 쾌속순시선이라 할 수 있다.

이 선박은 그 뒤 미사일 적재 쾌속선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선박의 개발에 따라 생긴 기술자료는 그 뒤에 개발된 쾌속선의 설계에 많은 참고가 되었다. 한편, 정부의 방위산업육성정책에 따라 1977∼1979년까지 해군과 현대조선소의 기술진이 중심이 되고 한국선박연구소의 기술진이 지원하여 한국형 구축함의 설계가 개발되었다.

이 선박이 건조되어 우리 나라 해안의 방위를 훌륭히 담당함으로써 우리 나라 쾌속선박설계 개발능력은 확보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특수한 쾌속선의 개발도 시도되었다.

1978년 초부터 (주)코리아 타코마조선은 공기부양(air cushion)방식에 의하여 선체를 물 위로 떠올려 선체 중량을 가볍게 하는 효과로 선박의 속도를 효율적으로 높일 수 있는 공기부양선을 개발하기 시작하여 1980년 여름에 수상전용공기부양선을 완성, 남해안의 연안항로에 취역중에 있다. 이 선박의 뒤를 이어 1979년에 수륙양용공기부양선의 개발에 착수, 시험선을 제작하여 자료취득 중에 있다.

선체형상과 선체저항과의 관계는 선형설계 및 개량의 견지에서 오래 전부터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었다. 저항성분 중 조파저항에 관한 이론적 연구가 1960년대 미국·일본 등의 연구에 힘입어 1970년대 초에, 실험적 연구는 197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

1970년대 인하대학교의 조규종(曺奎鍾) 등이 ‘유선추적법’에 의하여 조파저항이 최소인 선형계획법을 유도하여 이론적 연구결과가 국내에서도 선형설계에 활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바 있다.

조선공학연구의 기본 실험설비로서 선형시험수조를 들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선형설계와 성능추정을 위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1962년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길이 26.6m, 너비 3.1m, 수심 1.5m, 최대예인속도 1.2m/sec인 예인수조가 설치된 바 있다.

이어서 1971년에는 인하대학교에, 1974년에는 부산대학교에 예인수조가 각각 완공되었다. 이들 대학의 예인수조에서는 저항시험만이 수행되었고, 조선공학교육 및 학술연구에 많이 활용되어오고 있다.

1970년대에는 조선공업의 양적 팽창과 조선기술의 중요성에 따라 한국선박연구소의 설립과 함께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지원으로 대형예인수조를 건설하였다. 길이 223m, 너비 16m, 수심 7m, 최대예인속도 6m/sec인 이 대형수조는 국제수준의 것으로서 1978년의 가동과 함께 처음으로 전문연구원을 가지게 되었으며, 국내조선소의 선형개발 및 설계에 관련된 각종 선형시험기법을 자체 확보한 바 있다.

선박연구소의 수조에서는 가동 이래 1983년 말까지 유조선·산적화물선·콘테이너선·고속정·어선 등 총 72척의 선박에 대한 선형연구를 수행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 닥친 석유위기로 경제적 선박운용이 요구됨에 따라 에너지절약형 선형개발을 위한 일련의 실험적·이론적 연구를 수행하여 국내 조선소에 많은 기술적 지원을 하여왔다.

대표적인 예로서 양승일(梁承一) 등이 1982년에 대한조선공사와 공동으로 수행한 4만 4000t급 산적화물선을 들면, 선형개발로써 주기마력 14.5%, 연료소비량 23.7%가 절감되는 효과를 얻었으며 우리 나라에서 얻은 선형연구개발의 가장 좋은 결과라고 여겨진다. 선박의 고속화 경향에 따라 추진기와 운항성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첫째로, 프로펠러는 캐비테이션과 진동 등의 제한조건이 고려되어 설계되어야 한다. 프로펠러의 캐비테이션과 침식현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장비로서 캐비테이션터널이 1982년에 선박연구소에 설치되었고, 이에 따라 프로펠러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둘째, 운항성의 평가에는 선체운동, 파랑하중의 해석이 필요하며, 1970년대 이후 서울대학교의 황종흘(黃宗屹) 등이 주축이 되어 종규칙파 중에서의 선박의 상하동요와 종동요, 선수에서의 상대수직변위, 속도와 가속도, 파랑강제력 등을 추정하는 일련의 전산프로그램을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많은 후진양성은 물론 선수단면형상이 선체운동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운동 부문에서 선박연구소에 설치되어 있는 조파기와 강제동요장치 등은 이 분야의 실험을 처음으로 갖춘 것으로 일련의 실험들을 할 수 있게 되어 이 분야의 이론을 실선에 적용, 가능하게 하고 있다.

선체구조 분야의 경우, 대한조선학회의 창설과 함께 1960년대 중반경부터 연구활동이 시작되었는바, 초기에는 주로 선체국부강도와 관련하여 서울대학교의 임상전(任尙錪) 등에 의한 주요 선급협회의 규칙비교연구, 광탄성 실험연구 등이 수행되어 그 결과들이 설계자료로 제공되었다.

그 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자계산기의 보급과 함께 유한요소법의 국내 도입으로 본격적인 선체구조의 종강도·횡강도에 관한 연구를 비롯하여, 응력집중현상과 열응력분포현상 등에 대한 밀도 있는 연구가 각 대학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198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좌굴·충돌·소성 분야 등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져 극한설계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편, 1970년대 말부터 한국선박연구소와 조선업계의 구조공학자들에 의하여 유한요소법에 의한 강도해석을 선체구조설계시 실용화하기 위한 노력이 가속화되어, 현재는 거의 모든 대형조선소들이 보통의 상선설계시 전산기를 이용한 독자적인 구조해석능력을 갖추고 있는 실정이다.

선박의 진동문제와 관련하여서는 1960년대 말부터 부가질량에 관한 연구가 서울대학교의 황종흘·김극천(金極天) 등에 의하여 각종 선형단면에 대하여 수행되어 선체진동해석을 위한 밑바탕이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선체진동해석에 직접 수행될 수 있는 3차원적 부가질량의 산정기술이 이론 및 실험연구에 의하여 확립된 이래 선체진동해석의 국내 토착화가 이루어졌으며, 아울러 각종 국부진동에 대한 이론 및 실험연구가 1980년 초에 이르기까지 상당수 수행되어 왔다. 추진축계진동에 대하여서도 한국해양대학의 전효중(全孝重) 등이 주가 되어 상당한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기계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선체의 3차원적 복잡진동의 유한요소법에 의한 해석 결실과 함께, 이호섭(李鎬燮) 등을 중심으로 한 실선계측장비의 조직화에 의한 다수의 계측평가 및 방진대책의 성공으로 이 분야에 있어서도 기술의 국내 토착화가 상당히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현재 대형조선소들에서도 해석기술 및 장비조직의 독자화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으며, 연구 및 창조노력의 활성화가 기대된다.

1960년대 초에 국내유일의 현대식 중형조선소였던 대한조선공사에서 본격적으로 강선(鋼船)을 건조한 이래 1968년에 월남에 처녀수출된 360급 부선(艀船)을 비롯하여 대만에 수출된 350급 어선, 미국에 수출된 2만 톤급 정유운반선, 미국과 일본에 수출된 3만 톤급 정유운반선 등이 대한조선공사에 의하여 건조되었다.

1974년 현대조선소에 의하여 건조된 26만 톤급 유조선이 그리스선주에게 인도됨으로써 국내조선소들의 건조기술이 세계적 수준임이 입증되었다. 이 밖에도 고속함정의 건조를 비롯하여 공기부양선·석유시추선·해상특수구조물 등을 국내 조선소가 건조 또는 수출하여 우수한 조선기술이 확인되고 있다.

우리 나라 조선공업은 1970년대에 양적으로 급격히 팽창하여 현재 물량면에서 세계 2위를 점하고 있는 데 반하여 많은 불균형적 요소가 있으며, 특히 반 이상의 기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고, 선박설계도면을 외국에서 가져오는 등 기술적으로 해외의존도가 높고 연구개발이 설계로 결집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연구비·연구조직 및 연구시설 등도 한국기계연구소 대덕선박분소에만 어느정도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며, 연구의 공동활용체제도 미비한 상태이다. 연구인력도 매우 부족한 상태이고 민간연구소 등의 설립과 함께 해외에서 근무중인 유학생들의 귀국을 종용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1980년대 조선공업의 내실화를 이룩함과 더불어 조선기술의 고도화가 절실히 요구되며, 서로 협조하여 공동발전할 수 있는 협의기구의 구성이 필수적이다. 또한, 다른 선진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공업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분야인 해양자원개발 등으로의 진출이 기대되고 있다.

참고문헌

『대한조선공사삼십년사』(김두찬, 대한조선공사, 1969)
『조선공업』(남궁호, 대한조선공사, 1977)
『우리 나라 조선공업발달사』(한국선박연구소, 1978)
『한국해운항만사』(해운항만청, 1980)
『한국선급협회 20년사』(한국선급협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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