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교육 ()

개념
종교상의 지식 · 의례 등에 관한 교양을 비롯하여 종교적 정서를 함양하고 종교적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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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종교상의 지식 · 의례 등에 관한 교양을 비롯하여 종교적 정서를 함양하고 종교적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교육.
개설

종교의 의미나 개념에 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저명한 종교학자마다 각각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의 분석에 따르면 종교의 ‘종(宗)’은 원래 조상의 영혼을 모시거나 받드는 영묘(靈廟), 즉 사당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산스크리트[梵語]의 불교 경전을 번역할 때 불교용어 ‘싣다아안타(siddhānta)’가 ‘종’으로 번역되었다.

이 싣다아안타는 ‘완전한 성취’의 ‘싣다(siddha)’와 종료 또는 극치를 의미하는 ‘안타(anta)’의 합성어로, 불교에서의 ‘종’은 진리의 궁극적인 경지를 뜻하며, 이러한 ‘종’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으로서의 ‘교(敎)’가 성립한다.

이 경우 종교는 ‘종과 교’ 또는 ‘종의 교’라는 두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종교라는 불교의 용어가 한자문화권에서 종교 일반의 유개념(類槪念)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본이 1869년(명치 2년)에 독일북부연방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독일어 ‘레리기온스위붕(Religionsubung)’을 ‘종교’라고 번역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 독일어 ‘레리기온스위붕‘은 오늘날 종교를 뜻하는 ‘레리기온(Religion)’과 행위 또는 실천을 의미하는 ‘위붕(ubung)’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라틴어 레리기오(religio)에서 유래하는 ‘레리기온’의 어원과 의미는 ‘반복하여 다시 읽는다’는 뜻이 엄숙하게 집행되는 근행(勤行)이나 의식(儀式)을 가리키게 되었다는 학설과 ‘재결합’의 의미로 보는 주장이 있어왔다.

그리하여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서는 재결합의 학설에 따라 현대 이전까지는 “신을 배반하고 신으로부터 떠난 인간을 다시 신에게 결합 또는 연결시키는 것은 예수”이므로 진정한 종교, 즉 레리기온은 기독교에만 속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레리기온’의 이러한 어원설은 언어학적인 정당성을 잃고 있다. 라틴어 ‘레리기오’의 문헌적 용법의 조사에 따르면, 잘 알 수 없는 사물에 접했을 때의 공포나 불안 또는 의혹의 감정을 가리키며, 점차 이러한 감정을 야기하는 대상이나 이 대상에 대한 태도 또는 행동으로서의 의례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독일어 ‘레리기온’이 일본에서는 불교의 용어인 ‘종교’로 번역되었으나, 점차 특정종교를 떠난 유개념으로 사용되어 한문문화권에서 널리 일반화된 것이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류바는 종교의 정의들을 각각의 관점에 따라 주지적 · 주정적 · 주의적(또는 실천적)인 3개의 유형으로 분류해 나누고 있다. 그러나 가치나 태도 또는 사회적 내지 문화적인 관점에서도 정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여러 관점을 포괄하는 통합적인 관점에서의 의미나 정의도 시도되었다. 이러한 시도의 예로, 신학자 틸리히(Tillich,P.)의 “궁극적 관심”이나 비교종교학자 스트렝(Streng,F.J.) 등의 “궁극적 변화에의 방법”이라는 종교의 정의가 있으며, 이 둘을 결합하면 종교란 “궁극적인 관심과 변화에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 궁극적인 관심과 변화에의 방법이라는 관점을 보다 구체화하면, 종교란 결국 인간이 현실 속에서 자각되는 절망과 무력을 느끼고, 무한하고 지고한 것을 찾아 이를 받들고 궁극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생활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지적 · 정적 또는 의지적이라는 인간활동의 분석적인 일면이 아니라 이 모두를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태도, 즉 전생명의 약동이라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한편 이러한 본질을 지니는 종교가 구현되는 현장은 언제나 인간 개개인의 구체적인 생활이다. 즉 신앙의 소유자는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회심(回心)을 체험하고 신생(新生)을 얻으며 정복(淨福:맑고 조촐한 행복)이나 지고(至高)의 삶을 기약할 수 있게 되며, 그러한 계기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만 얻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종교생활은 가정과 사회의 생활 가운데서 정진(精進)을 통하여 종교가 지니는 본질을 더 잘 나타낸다고 보고 있다.

불교에서의 왕상(往相:공덕을 쌓아서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 주는 일)에 대한 환상(還相)이나 기독교에서의 신(信) · 망(望) · 애(愛)가 바로 그것이다. 무(無)와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 신의 은총이나 불광(佛光)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힘찬 정진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 그들을 지배하는 향기 높은 생활의 규범이나 이상은 회심으로 얻은 환희와 보은이 삼라만상에 미치는 사랑과 자비심이 되어 봉사와 희생심으로 영원한 빛을 찾게 하며, 인내와 정진과 극기의 생활로써 자신의 평화를 얻도록 한다.

이러한 생활의 이상들은 교육에서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이며 내용이다. 종교교육이라고 할 때 교육 속에서 종교가 지니는 뜻은 이러한 관련 속에서이다.

하지만 종교와 교육 관계에서의 역사적 전개과정은 반드시 그 동기가 교육의 세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종교교육은 거의 불교나 기독교 등 특정종교의 포교활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결국 종교교육은 애당초 특정종교의 교육이었다. 따라서 포교활동과 관련된 교육의 의미는 관습과 사회적 암시 또는 외적 권위로 이루어지는 전통신앙의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이러한 신앙형태는 형식적이고 미신화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교육의 본령을 찾는다면 오직 위대한 종교가들이 체험한 신앙의 내용들을 추체험(追體驗)하게끔 하는 의도적인 노력에서라고 하겠다.

불교교육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한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의 일로, 불교는 사상적으로 넓은 포용성을 지니고 한국인의 토착적인 사상과 융합되면서 수용되었다. 특히 불교의 인생과 우주의 깊은 철리는 한국인의 지적 사유에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학문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열어 주었다.

또한 불교의 자비사상은 한국인의 폭넓고 따뜻한 생활과 융합되면서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수준 높은 윤리관을 확립하게 한다. 그러나 불교는 의도적이고 형식적인 세속의 학교교육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즉, 불교는 주체적 자각을 그 핵심으로 하기 때문에 대상이 제한되고 세속의 공리적인 목적이나 능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한 학교교육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승려들을 위한 불교교육은 불교의 전래 초기부터 있어 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체제화된 승려교육의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내용과 방법은 8세기 전반기에 통일신라의 장보고(張保皐)가 당나라 산동반도 적산(赤山)에 세운 통일신라의 사찰 법화원(法華院)에서 이루어진 신라 승려들의 생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내용은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의 고승이었던 엔인(圓仁:794∼864)이 당나라에서 약 10년간에 걸친 구도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한국교육사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추진된 교육근대화 이전까지는 유교가 학교교육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생활방식 내지 사회의 문화 자체가 불교적인 것이었다.

결국 삼국시대 이래 유교가 장악한 학교교육과 실제의 일상생활이나 사회가 지니는 교육적인 기능을 담당한 불교가 공존해 온 것이다. 이 점은 시종일관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을 견지했던 조선시대에서도 본질적으로 같았다.

한국교육사에서 불교가 지닌 위와 같은 역할 또는 기능이 한국인에게 준 중요한 영향은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인의 공통된 윤리의식의 형성이다. 삼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널리 전파됨으로써 삼국의 상하를 불문하고 한국인 대부분이 불교를 신봉함에 따라 불교의 5계나 10선법(善法)을 지키게 되어 한국인 모두 공통된 윤리적 표준과 의식을 마련하게 하였다.

둘째, 민중교화를 통한 민중 계몽의 역할이다. 불교인들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신행(信行)으로 이 땅에 정토(淨土)의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불교를 통하여 민중들은 자신의 가능성과 위치를 깨닫게 되었고, 지배층은 위민(爲民)의 이념을 가다듬게 되었다.

셋째, 사원의 교육기관 또는 학문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이다. 사원은 불교 의례의 집행과 수행(修行) 및 전법(傳法)을 하는 곳이면서 상하 인민이 모두 감화를 받는 사회 교육적 기관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승려들은 인격수양이나 독서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사원을 개방함으로써 수련의 도장인 동시에 학문연구의 상아탑 구실을 하였다.

넷째, 한국인의 민족예술 내지 민족문화의 창조와 전승이다. 불교의 심오한 사상과 아름다운 정신은 영원과 무한을 향한 종교적 신앙과 의식(儀式)이 결합되어 미술 · 음악 · 무용 · 문학 등 수많은 유형 · 무형의 국가유산을 불교계에서 창조하고 전승해 와 오늘날 한국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것들 대부분이 불교적인 국가유산이다.

이상과 같이 불교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커감에 따라 여러 고승들이 속출하게 된다. 이러한 불교의 융성은 자연히 고승들로 하여금 교육문제에 직접 · 간접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에 따라 그 나름의 일정한 교육사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원광(圓光)과 원효(元曉)를 중심으로 당시의 대표적인 교육사상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신라의 고승 원광(555∼638)은 일찍이 문장을 연마하고 유학(儒學)과 도학(道學) 및 제자(諸子)와 사서(史書)를 널리 섭렵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589년(진평왕 11)에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중국 여러 곳에서 여러 불교경전을 연구하는가 하면 선정(禪定)의 수행(修行)에도 힘썼다. 많은 수행자(修行者)들이 여러번 강의를 간청하자 이를 계기로 ≪성실론≫과 ≪반야경≫등을 위시하여 여러 경전의 연구와 강의를 통해 중국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신라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원광의 귀국을 여러 번 수(隋)에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600년에 귀국하여 국왕과 신하들의 존경을 받으며 대승경전을 강론하였다. 그가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러 있을 때 청년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와 평생의 계명(誡銘)을 청하였다.

원광은 이에 “보살계와 10계가 있으나 신하와 자식의 처지에 있는 그대들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세속오계를 가르쳤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사군이충(事君以忠),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는 사친이효(事親以孝), 친구의 사귐에는 신의가 있어야 하는 교우유신(交友有信), 전쟁에 임해서는 물러나지 않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을 하더라도 반드시 가림[擇]이 있어야 한다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었다.

이 두 청년이 “살생을 하더라도 반드시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고 하자 원광은 “여기에서 가린다는 것은 불교의 청정한 삶을 닦아야 하는 육재일(六齋日)과 각종 동물들이 산란하는 봄철과 여름철에는 어떠한 살생도 금할 것이니, 이는 시기를 가리는 택시(擇時)이고, 가축과 먹어보았자 배를 채울 수 없는 미물은 죽이지 말 것이니, 이는 대상의 생물을 가리는 택물(擇物)이다.”라고 깨우쳤다.

이 세속오계의 내용은 유교적으로 표현하면 충(忠) · 효(孝) · 신 · 용(勇) · 인(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나 사상은 불교에서도 강조한다.

국가에의 충은 ≪법화경≫과≪인왕경≫및≪금광명경≫의 호국삼부경에, 부모에의 효와 친구와의 사귐과 여러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신의는 아함부의 경전에 속하는 ≪육방예경≫에 깔려 있다.

또, 용(勇)은 대승불교의 보살도(菩薩道)인 6바라밀(波羅蜜) 가운데 불퇴의 용맹정진(勇猛精進)에서 각각 자세하게 깨우치고 있으며 불살생(不殺生)은 불교사상의 전반에 깔려 있는 자비의 윤리이다. 이러한 세속오계는 당시 신라사회의 역사적인 발전단계에서 꼭 필요한 윤리였다.

여기에서 원광의 위대성은 불교와 유교에 공통되는 보편성을 지니면서 당시의 사회적 발전단계에서 요청되는 윤리가 무엇인가를 통찰하여 확고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독창적으로 재창조하였다는 점이다. 원광의 이러한 안목과 태도에서 교육이 외래의 문물과 사상을 수용할 때 지녀야 할 기본자세를 배우게 된다.

한편 삼국통일을 전후한 신라의 원효(617∼686)는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종교가이며 사상가인 동시에 세계적인 철인이고 대저술가이다. 그의 현존하는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 부 240권이나 된다.

그는 불교 안의 여러 사상과 주장들을 모두 ‘일심(一心)’의 발현으로 보고, 그 발현의 여러 양상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융회(融會:자세히 이해함)하려 하였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중생들 각자의 일심은 계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언제나 인간의 본성 자체는 그대로라고 하였다. 단지 계기에 따른 여러 가지 심리적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혀 본래의 일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심의 주인노릇을 못하고, 여기에 인간의 자기상실이 있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사상은 일심의 회복에 그 목적이 있으며, 그의 수많은 저술들은 이 일심의 해명과 그 실현의 길을 밝히는 것이었다. 특히 원효의 위와 같은 화쟁사상은 군사적 차원의 삼국통일을 정신적인 차원에서 하나로 통합하는 데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도 하겠다.

고려시대

고려의 건국은 통일신라 말기에 새롭게 등장한 선종(禪宗) 계통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다. 태조 왕건(王建)이 후대의 군왕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유언한 10훈(訓)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려는 실제로 불교를 국교로 하는 왕조였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는 삼국 내지 통일신라 이상으로 불교국가이며 생활문화 자체는 더욱 불교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고려시대의 교육에서 불교의 소임은 삼국 내지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세속의 학교교육에서가 아니라 주로 일상생활에서의 비형식적인 교육 내지 사회적으로 충만해 있던 불교문화의 교육적 기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의 여러 불교교육의 실천가나 사상가 가운데 지눌(知訥, 1158∼1210)의 교육사상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것이다.

신라의 원효와 고려의 의천(義天)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통불교적(統佛敎的) 지향성의 전통은 지눌에 이르러 비로소 명실상부한 결실을 이루어 오늘에 이른다. 그는 선(禪)과 교(敎)가 하나라고 주장하고 그 이론적 체계의 수립과 실천적 수도에 전력하면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지눌의 경우 교육의 본질은 자각에 있었다. 그러나 이 자각은 점진적인 개선이나 형성의 과정이 아니라 순간적인 비약의 전환을 본질로 한다고 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돈오(頓悟)이다. 그러나 돈오의 자각이 있다고 해서 윤회의 과정을 겪으면서 익혀온 육체적 · 정신적 습관성은 일시에 수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돈오한 자각의 내용이 완전히 인격화하여 삶 속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자각에 의한 계속적인 노력으로서 생활태도를 개선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점수(漸修)이다. 불교적인 관점에서의 교육이론에서는 수도(修道)와 자각(自覺)의 성격과 이 두 가지의 선후 문제가 논란의 본질적인 쟁점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적인 인격완성의 이론에서는 수도를 통해 자각하도록 하는 것인 바 수도에 있어서나 자각에 있어서나 모두 점진적으로 개선, 형성이 되는 것을 ‘점(漸)’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어떤 계기를 만나 한 순간에 비약적으로 완성되는 것을 ‘돈(頓)’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도와 자각 가운데 어느 것을 선행(先行)하고 후행(後行)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수도와 자각 각각이 점적(漸的)인 것이냐 아니면 돈적(頓的)인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관점에 따라 불교적인 교육이론은 다음과 같이 점진적인 수도를 거쳐 점진적으로 자각한다는 점수점오설(漸修漸悟說), 점진적인 수도를 거쳐 어느 한 순간에 비약적으로 자각한다는 점수돈오설(漸修頓悟說)가 있다.

또, 수도한다고 해도 자각이 전제되지 않아 미로의 방황에 불과할 뿐이어서 진정한 수도가 아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어느 한 순간에 자각한 다음 이 자각한 정신적 빛에 의해 인도 받아 계속적으로 점진적인 수행을 거쳐 인격적 완성을 성취한다는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가 있다.

그리고 자각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며 이 자각이 진정한 자각이라면 자각과 동시에 수도도 비약적으로 완성된다는 돈오돈수설(頓悟頓修說), 어느 한 순간에 수도가 완성된 다음 이 완성된 수도의 힘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자각하게 된다는 돈수점오설(頓修漸悟說), 어느 한 순간에 수도가 완성되자 바로 자각도 비약적으로 완성된다는 돈수돈오설(頓修頓悟說)로 나누어진다.

지눌은 이들 각각이 다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돈오점수야말로 모든 성현들이 밟아간 길이라고 했다.

인격교육에 있어서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서 성장이나 형성 또는 수정되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위인전이나 역사적 사실에 접하거나 누구를 만나 한 순간에 크게 감동하여 인생관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측면이 있다. 지눌의 돈오점수설은 이와 같은 두 측면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다시 하나로 통합하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이제까지 한국사의 맥락 속에서 특히 삼국 · 통일신라 · 고려의 각 시대를 중심으로 불교교육이 지니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인간형성을 위한 가치 지향적 목적의식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의 불교가 지니는 인간형성이론의 특징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즉, 첫째로 한국불교의 인간형성이론은 인간형성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거나 기르는 것이 아니며, 또 모험적 기도(企圖)를 통하여 새로이 되는 것도 아닌, 본래적인 자기모습으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재전환이다. 무엇인가 새롭게 만들거나, 기르거나, 되게 하는 교육관과는 달리 학습자의 주체성을 살리는 자아실현의 교육관이다.

둘째, 한국불교의 자각은 인격교육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 자각을 통한 인간형성의 이론은 상황에 대한 개인의 합리적인 적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격의 재구성도 아니고, 인간의 타고난 잠재력의 조화 있는 발전이론과는 다르다.

자각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불교의 인간형성이론은 각자 인격의 내면 속에서 나 자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가를 자각하여 그 내면적 핵심에서 출발하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론이다.

그 가운데서도 고려 지눌의 돈오점수설은 한순간의 비약적인 돈오(頓悟)가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서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실천을 통해서 돈오의 내용이 인격화한다는 인간형성이론이다.

근대의 불교계 학교교육

근대 서양의 국가주의 내지 제국주의는 식민지 획득의 경쟁을 하였다. 서양의 이러한 정책은 결국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나타났고, 그 물결은 한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도 근대적인 과학적 지식에 기초한 산업기술에 힘입어 군함으로 무장된 군사적 압박을 통해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다.

결국 성리학 중심의 유교사회인 조선은 서양의 이러한 무력을 앞세운 힘과 지식 및 기술 앞에 압도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외세배격의 민족주의가 태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유교적인 경학 중심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역량의 구비가 시급함을 깨았다. 이른바 교육근대화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나타났다. 이 운동은 정부당국과 민간의 민족주의자 및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 가운데 종교계는 카톨릭계와 개신교계의 기독교 선교사들과 불교계가 주도했다.

근세조선 500년간 불교는 모든 면에서 가혹한 압박을 받아, 심지어 승려들의 도성출입이 금지될 정도였다. 그러나 세계 열강의 선교사들과 일본의 승려들이 도성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자 정부도 불교의 사회적 존재 의의를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타난 것이 1902년의 36조로 된 대한사찰령(大韓寺刹令)이었으며, 이 사찰령에 의거하여 서울에는 원흥사(元興寺)를 국내의 수사찰(首寺刹)로 하여 전국의 불교행정을 관장하고, 지방에는 16개의 지방 수사찰을 정하여 지방의 불교행정을 맡게 했다.

그리고 이 사찰령 제29조에는 사찰의 정황에 따른 학교의 설립과 유능한 승려의 교육을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한국불교사에서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校)가 서울의 원흥사에서 1906년에 개교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명진학교는 현재 동국대학교의 연원이다. 이 명진학교의 개교를 계기로 각 지방의 사찰에서도 자체적으로 학교들을 설립 · 운영하게 된다.

기독교교육

가톨릭과 교육

가톨릭의 공식명칭은 가톨릭교회 또는 로마가톨릭교회이다. 한국에 전래되면서 서학 · 천주학 · 천주교 등으로 불리어오다가 천주교로 정착하였으며, 가톨릭이라고도 한다.

가톨릭의 동아시아 진출의 직접적인 계기는 종교개혁이 초래한 현상에 대응한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 선교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한국에 가톨릭이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가톨릭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진출해 있었으며 이들 선교사 신부들은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지니고 있어 중국의 황실과 지식인들로부터 깊은 관심과 신망을 받고 있었다.

한편 중국의 북경을 왕래하는 조선의 사신들이 서양의 문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기회가 닿는 대로 이들을 찾아 필담(筆談)을 통해 그들의 학문과 종교들에 대해 듣기도 하였다.

또, 그들이 한역(漢譯)한 기초적인 가톨릭의 교리서를 포함하여 서양의 문물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구입해 와 일부 학자들 사이에 기독교 서적이 조심스럽게 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근세조선 사회는 성리학 중심의 유교사회여서 직접적으로 일반교육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사상의 측면에서 볼 때 그 당시의 실학파에 속하는 일부의 인사들은 서학이라는 천주교가 배경이 된 서양문명에서 실학이 가지는 사상적 기반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서양문명의 수용계기로 삼았다. 천주교는 유교사회에 있어서 계급제도와 무속적인 미신을 타파하여 개화사회로 이끌어오는 데에 크나큰 역할을 했다.

개신교와 교육

개신교의 한국 전래는 1816년(순조 16) 영국 출신의 홀(Hall,B.)이 추진한 이래 서양인들에 의한 꾸준한 시도가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의 전교에 뜻을 두고 만주 통화현(通化縣)의 고려문(高麗門)에 진출한 스코틀랜드의 일치자유교회 출신인 로스(Rose,J.)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McIntyre,J.)가 1873년(고종 10)에 그곳에서 의주 출신의 청년학자 이응찬(李應贊)과 서상륜(徐相崙) 등에게 성서를 가르치면서 함께 성서번역에 착수한 것이 그 최초라 한다.

그러나 개신교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882년 미국과의 한미수호조규 체결을 계기로 구미 각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이후이다. 개신교는 외국에서의 선교방식을 교회의 목회활동과 함께 교육과 의료의 활동으로 병행해 왔으며, 이 점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사업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의료선교사 알렌(Allen,H.N.)이 1884년에 도착해 그 다음해인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의료원인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하고 의료시술을 시작했다.

같은 해에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Appenzeller,H.G.)와 스크랜턴(Scranton,W.B.)의 모자가 내한하였고, 이 가운데 스크랜턴의 어머니는 곧 이화학당을 세웠으며, 아펜젤러도 같은해에 배재학당을 세워 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각국의 여러 교파들이 속속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선교는 물론 구미의 근대적인 학교를 설립해 교육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의 각 종파에서 세운 학교들은 796개 교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사실은 구미의 근대적인 사상과 지식 및 종교를 통한 인생관의 확립에 큰 기여를 했다.

종교와 교육의 관계

종교교육의 필요성

근대 이후 국 · 공립학교에서는 종교교육을 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인격의 교육에 종교가 불필요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인간의 기본권 가운데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만이 가장 확실한 지식이라는 편견의 결과 종교적 지식은 미신이라는 오해에 의하여 종교교육이 배척된 측면도 있다.

종교를 궁극적인 관심이자 인간의 궁극적인 변화의 방법이라는 점에서 볼 때 교육 또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계속 추구하다 보면 결국 궁극적인 종교적 차원과 만나게 된다. 특히 종교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성의 교육이다.

매스로우(Maslow,A.H.)는 인간이 지닌 자질 전체를 최고의 경지까지 전개하여 실현시키는 “자기실현적 인간”이라는 개념과 이러한 자기실현적 인간이 경험하는 최고의 도달점인 지고경험이 지니는 종교적 차원을 제시한 바 있다.

또 올포트(Allport,G.W.)는 인격성숙의 판단기준과 이러한 기준에 따라 종교적으로 성숙한 인격의 정조가 지니는 특성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학설들은 모두 개인이 실현할 수 있는 종교성이기도 하다.

한편 종교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으로 회심(回心)이 있다. 이 회심은 일종의 인격적 전환에 해당하는 것으로 종교적 차원의 회심은 새롭게 거듭남, 정신적인 눈뜸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종교적 체험이다. 이러한 회심은 경우에 따라 돌발적이고도 비약적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점진적이고도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 오기도 한다.

제임스(James,W.)에 의하면 이 회심이 교육에 있어서 지니는 중요한 의미는 인격을 통합하여 자기의 정체성을 성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종교교육의 유형

종교교육의 유형은 대체로 특정한 종파의 교육을 뜻하는 ‘종교의 교육’, 여러 특정종교들을 포함하여 종교 일반의 본질과 문화를 이해하게 하는 ‘종교에 관한 교육’, 특정종교들의 가르침이나 신념체계가 아니라 원숙한 인격교육을 위해 필요한 종교성 즉 궁극적 가치지향성을 교육하는 ‘종교적 교육’의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종교의 교육은 특정한 종파의 입장에서 종교의 교육을 한다 해도 다른 특정종교들에 대하여 배타적인 선입관이나 태도를 형성 또는 조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 하면 민주사회는 서로 다른 신념과 가치가 공존하면서 사회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다가치의 개방사회이기 때문이다.

흔히 종교의 교육은 특정종교를 위한 교육이라는 점에서 배척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많은 경우 종교성을 형성하는 구체적인 계기는 특정종교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면 일률적으로 배척만 할 것은 아니다.

종교에 관한 교육은 국 · 공립학교에서도 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한다. 이는 종교적 체험을 매개로 종교성을 함양하는 교육에는 한계가 있으나 학습자에게 종교성을 지향하는 건전한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건전하고도 성숙한 인격을 형성하는 인간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궁극적 가치지향성으로 압축하여 정의할 수 있는 종교성을 형성하도록 하는 종교적 교육에서 종교교육의 교육적 진가는 나타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교육은 특정한 종교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국 · 공립학교에서도 실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명상이나 묵상 또는 기도나 발원(發願)은 비록 명칭이나 방법에는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으로 종교 대부분의 공통된 것이다.

현황과 전망

현황

한국에서의 종교교육은 처음부터 특정종교의 포교나 선교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종교교육이라 하면 특정종교의 종교교육을 뜻하였다.

결국 종교적 정조의 함양이라는 인간 본연의 전인적 교육의 측면은 고려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들의 종교교육을 특정의 종교기관인 사찰이나 교회 등에서 기대해 왔다.

특히 학교교육이 발달된 현대에는 특정한 종교적 신앙을 위한 교육을 학교교육 속에서 실시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립학교가 등장하였다.

따라서 종교교육은 종교계통의 사립학교에서는 특정종교의 관점에서 종교교육을 하는가 하면, 특정한 종교의 기관이나 단체에 의해 특정종교의 종교교육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은 구체적인 교육활동으로서 역사적인 사실과 경험이 축적된 것이며, 오늘날의 교육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인간교육 일반이라는 범주로 생각하는 종교교육의 방향이 오늘날의 학교교육에서 망각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국 · 공립학교의 경우 <헌법>과 <교육법>을 통해 특정종교를 위한 교육을 금하고 있다.

그 결과 학교는 종교문제에 대하여 무관심 내지 불관여의 상태이며, 종교적인 요소는 배제하는 경향마저 있다. <헌법>과 <교육법>에 표명된 종교교육의 위상은 종교교육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종교교육에 대하여 소극적 내지는 부정적인 사태를 낳았다.

한편 종교교육을 여러 교육활동 가운데 하나의 영역으로 한정하거나 인간성 가운데 한 부분의 육성으로 간주되고 있는 경향은 잘못된 이해이다. 이는 인간생활 가운데 미리 신성한 영역을 설정하고 광범위한 인간교육의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의 특수한 활동 분야로 종교교육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종교가 인간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궁극적인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존재 전체와 관계되는 인간의 교육과 깊이 관련되는 것임을 간과한 것이라 하겠다. 한국의 <헌법>에는 종교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정교분리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교육법>에서는 국 · 공립학교에서 어느 특정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금지하고 있다. 신앙과 종교의 자유는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헌법>에 명문화시키고 있고 기본적인 인권의 하나로 보장되어 있지만 이는 근대국가가 역사적으로 많은 투쟁을 겪으면서 확보해 온 것이다.

확실히 정교분리의 원칙은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원칙이지만 이것이 지나쳐서 국가의 종교에 대한 전면적인 무관심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의 본질로 보아 정교분리의 원칙을 국가의 종교에 대한 무관심으로 확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 하면 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를 일반적 가치체계로 본다면 인간이 자기생활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숙고와 그 해결에 정신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인간생활의 일반에 필요한 가치이며, 국가가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밑받침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이기도 하다.

물론 국가는 어느 특정종교와 연결되어 종교에 대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국가의 정책은 언제나 넓은 일반적인 문화가치로서의 종교로 범위를 제한하고 이 범위 안에서는 국가가 종교적 가치일반을 추진하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다.

전망

근대국가에서 종교적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데에서부터 양자는 그 영역을 각각 명백하게 구분하게 되어 국민공동체는 세속적이고 비종교적인 공동체로, 그리고 종교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가 설치하는 학교는 공적인 학교로서 공권력의 관리하에 있게 되고 종교로부터 분리되어 세속적 성격을 지닌다고 하는 것은 근대의 다원적 그리고 민주적 사회에서의 경험에서 이루어진 약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 자체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교육의 분야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이 반드시 정당하게 평가되지는 않고, 일정한 약속 위에서 이루어진 조건부의 제도와 내용인 것을 자칫하면 그 자체로 정당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육내용의 세속화에 있어서는 국가가 공교육의 이름으로 종교분리의 원칙을 위하여 종교의 지배와 간섭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교육내용으로부터도 종교적 요소를 배제하려고 할 경우 본래적인 정당성은 인정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거꾸로 국가가 종교 대신에 세속적 권위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 교육의 세속화는 급속한 변혁기의 사회가 지니는 여러가지 인간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갖가지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특히 물질만능의 유물사상에 대한 취약상은 교육으로부터 종교를 전면적으로 배제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반성이 일고 있다.

그리하여 종교적 정조의 함양을 통한 인격의 도야를 학교교육 속에서도 실시해야 한다는 자각이 있는가 하면, 그 결과 국 · 공립학교에 있어서도 특정종교의 교육이 아닌 조건으로 종교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고 이해하게 하며, 종교적 정조를 함양할 수 있도록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과외활동으로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종교활동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현상도 있다.

연구방향

한국의 종교교육사 연구는 한국의 종교사상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확인하고 그 확인된 종교사상이 지니는 인간교육에 있어서의 의의를 분명하게 인식함을 목적으로 한다.

교육의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관과 관련되는 문제이므로 확인되어야 하는 종교교육사상은 인간관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종교교육사상에 대한 접근에는 크게 보아 두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인의 역사적이고도 구체적인 삶의 양상을 통하여 접근하는 방향이며 또다른 하나는 종교사에 있어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종교사상가의 문헌 속에 나타난 인간에 관한 이론들에 접근하는 방향이다.

이 가운데 전자는 주로 신앙형태적인 측면에서의 생활사적인 성격의 것으로 한국인의 구체적이고도 특수한 것이 될 것이며, 후자는 주로 철학적인 성격의 것으로 이론적이고도 인간의 본질적인 제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접근방법을 구체적인 교육현장 속에 내재하고 있는 종교적 영향의 성격들을 추출하는 데에 활용하는 동시에 인간교육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교육철학적 의의를 밝히는 데에도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종교교육에 대한 사실적인 혹은 실천적인 반성은 원리적인 면에서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 한국 종교교육의 실정이다.

이는 특히 <교육법>에 있어서 종교교육이 차지하는 위치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 동안 교육연구의 흐름 자체가 개개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의식되고 심각한 문제로서 제기될 수 있는 인간존재 자체에 연관되는 근본적인 것에 관해서는 외면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로서 진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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