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삶에 필요한 생활자료를 만들어 내는데, 이러한 활동이 계속될 때 그 행위를 생업이라고 한다. 인간사회가 원시적인 자급자족 상태로부터 벗어나 점차 분업이 진행됨에 따라, 생업활동은 전문적으로 분담되고 그 성과가 상호 교환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분업적 노동과정 속에서 직업이 성립하게 된다.
분업화된 사회가 전체로서 통합된 상태를 유지하고 그 구조의 재생산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그에 꼭 필요한 경제적 · 정치적 ·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문화생활의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물자의 생산 · 유통 · 분배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실제로 인류사를 통하여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직업들은 이러한 경제활동과 관련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둘째, 사회의 원활한 움직임을 위하여 물자의 생산 및 분배 과정을 조정 · 통제하는 정치적 기능이 필요한데, 이 정치 영역에서도 다수의 직업군이 출현하게 된다. 왕조시대의 복잡한 관료기구나 현대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방대한 통치기구는 모두 정치영역에서 필요한 직업들을 창출하였다.
셋째, 기존의 정치 · 경제질서를 정당화하여 사회통합을 기하고 사회과정의 중단없는 진행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주술 · 교의(敎義) · 지식 · 정보의 영역을 관장하는 직업이 창출되게 마련이다.
유교이념에 입각한 조선시대의 선비 · 승려나 무당 및 현재 산업사회에서의 교육 · 문화 · 정보산업 분야에서 일하는 노동력은 대체로 이러한 기능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가 급격한 변혁기를 맞이하게 되면, 물자의 생산 · 유통 방식을 비롯하여 정치조직과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갖가지 변화현상이 야기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직업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즉, 이전에 중요시되던 직업의 비중이 약해지거나 또는 소멸하여 버리고, 새로운 직업군이 출현한다. 또한, 계속 남아 있는 직업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과 위계서열상의 위치, 그리고 충원방식에 변화가 많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변동은 곧 직업구성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개항기 이전까지 사회변동의 속도가 퍽 느린 전형적인 농경사회였다. 따라서, 농업인구가 직업활동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으며, 수공업 · 상업 ·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노동력은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데 불과하였다.
개항기에서 식민지시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상업과 공업의 발달이 상당한 정도까지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라 이 부문 직업활동에 종사하는 인구도 증가하였다. 교육 · 문화활동도 공식화하고 조직화됨으로써 전문직과 서비스직 종사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사회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산업 사회로 급격히 탈바꿈하여 왔으며, 특히 1960년대 이후의 사회변동은 그 규모와 속도, 그리고 질적 구성에 있어서 괄목할 만하다.
이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직업구성은 산업사회 특유의 모습을 띠게 되었으며, 오늘날과 100년 전을 비교할 때 직업구성 · 직업관 · 충원 방식 등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점증하는 분업 또는 사회적 분화의 원리는 지난 1세기 동안의 한국 사회변동과정을 특징짓고 있다고 하겠다.
초기 원시사회 단계에서의 생업은 직업이라고 이름짓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뒤 농경과 목축이 분화되어 농경사회적인 특성이 정착해 가고, 청동기문화가 발전되어 수공업이 농업으로부터 독립된 분야로 행해짐에 따라, 분업과 교환이 성립됨으로써 전문적인 직업이 생겨났다.
한편, 이러한 사회과정은 특정형태의 국가를 출현시키고, 이들 국가 내부에 있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분화를 지속적으로 관철시켜 고대적 신분관계를 형성시켰다. 그 뒤 이러한 신분 분화는 신라의 골품제, 고려의 귀족제도, 조선의 반상제도 등을 통하여 각 시대에 따라 독특하게 발전된다.
개항기 이전의 사회를 전통사회라고 할 때 이 전통사회에서의 직업은 신분제도와 밀접히 관련된다. 신분제 사회에서 개인의 직업은 그가 가지는 신체적 · 기술적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로 혈통과 가문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개인은 그의 자질과 소망과는 관계 없이 출신 배경에 따라 주어진 직업을 승계하였다. 더욱이 신분간의 장벽이 두껍고 그만큼 사회적 상승 이동의 통로가 막혀 있었기 때문에, 세대내 · 세대간 직업이동도 제한되어 있었다.
신분의 분화와 직업구성과의 관계를 비교적 완성된 형태로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 조선시대의 반상제도이므로, 이를 중심으로 전통사회의 직업구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사회의 신분구조는 지배층인 양반과 중인, 피지배층인 양인과 천민으로 구성된다. 양반은 집권 사대부를 포함한 토성사족(土姓士族)으로서, 경제적으로는 지주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 또는 관료 예비군이고, 사회적으로는 지방사회의 지배자였다. 사족들은 기본적으로 생산노동에는 종사하지 않으면서, 국가권력을 매개로 토지를 세습, 사유화하여 지주로서 등장한다.
이들의 토지는 지주-전호(佃戶)관계에 의하여 경작되므로, 이 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에 힘입어 양천농민(良賤農民)을 신분적으로 지배한다. 또한, 이들은 학문과 교육을 독점한 지식층으로서, 신분제적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 이들 중 일부는 과거나 천거에 의하여 문 · 무 관직에 진출하여 국가관료로서 정치적 기능을 담당한다.
국가통치 기구의 성격상, 수기치인지학(修己治人之學)을 양반의 고유 영역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정책입안 및 정책결정권자로서의 당상관의 관직을 그들이 모두 독점하였다. 또한, 양반의 군역(軍役)복무는 특수병종에 소속되어 무관직을 얻게 됨으로써 관료로의 진출이 가능해지는 특권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같은 양반 내에서도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으로 말미암아 문반이 무반보다 우월하였으며, 적서의 구별이 엄격하여 서얼(庶孼)과 그 자손은 신분상 · 직업상 제약을 받았다.
신분에 따른 관직의 종적인 계열화와 한품서용(限品敍用:조선시대, 서자나 신분이 떨어지는 사람을 관원으로 쓰거나 죄지어 면관된 사람을 다시 쓸 때, 일정한 벼슬까지를 제한한 일)을 통하여 신분과 직업이 세습되기 때문에, 관리를 임명할 때에도 항상 가세(家世)와 문지(門地)가 문제되었다. 가세와 문지가 좋은 양반은 화(華) · 요(要) · 청(淸)의 직(職)을 맡을 수 있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관직은 행정의 중추기관인 의정(議政), 유교적 지배 이념의 창달처인 옥당(玉堂), 양반의 인사권을 장악한 이조 · 병조의 낭관, 국왕을 규제하고 정치의 방향을 잡는 직책인 대간(臺諫)과 사관(史官)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직들은 관료정치의 수행에 있어 핵심적인 직책으로 반드시 문과(文科)에 합격한 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한편,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양반들도 그 거주지를 중심으로 유향소(留鄕所) · 향청(鄕廳) · 사창(社倉)과 같은 지주연합체를 구성하여 지방 행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국가의 하위 행정실무와 하급군직은 양반이 아닌 중인층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중인층은 특수 기술직을 세습하였으며, 제한된 범위 안에서 교육을 받고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한정된 직위를 보장받았다. 이 계층에는 중앙의 기술관, 서리(胥吏), 군교(軍校), 토관(土官) 등이 있다.
기술관은 역(譯) · 의(醫) · 음양(陰陽) · 산(算) · 율(律) · 화(畵) · 도(道) · 악(樂) 등 이른바 잡학(雜學)이라 불리던 실용적 기술 분야에 종사하였으며, 잡업인(雜業人)이라고도 불리었다.
기술관은 기술학 생도, 상급 기술관[역관(譯官) · 의관(醫官) · 천문관(天文官) · 지관(地官)], 하급 기술관[산관(算官) · 율관(律官) · 도류(道流) · 금루관(禁漏官) · 화원(畵員)], 그리고 잡직 기술관[악생(樂生) · 악공(樂工) · 상도(尙道) · 지도(志道) · 선회(善繪) · 선화(善畵) · 화사(畵史) · 회사(繪史)]등으로 분류된다.
이 중 상 · 하급 기술관직은 주로 중인이 담당하는 반면, 잡직 기술관직은 양인이나 천민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특히, 역관은 외교정책 수행과정에서 통역을 담당함으로써 사행(使行)에 중요한 기능을 발휘함과 동시에 밀무역에도 종사하였다.
이들 중에는 이러한 무역활동을 통하여 상당한 재부를 축적하여 양반이나 소상인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관은 국가의 의료 사업에 종사하거나 개인적으로 의업을 수행하였고, 율관은 법전 운영의 실무를, 산관은 수학 · 통계 · 계산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관상감에 소속된 천문관은 천문 관측과 역서의 관리를, 지관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묘지와 집터를 선정하는 일을, 금루는 물시계로 시간을 측정하는 직무를 담당하였으며, 도류는 도교의 행사인 초제(醮祭: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관장하였다.
이 밖에 서리(胥吏)는 중앙과 지방의 문 · 무 각 관아에 소속되어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관리로서, 이서(吏胥) 또는 아전(衙前)이라고도 불렸다. 중앙의 각 관아에 소속되어 있는 경아전(京衙前)인 녹사(錄事)와 서리, 지방 관아에 소속되어 있는 외아전(外衙前)의 향리(鄕吏)가 여기에 속하며, 이들은 관청의 문서와 전곡 등을 관장하였다.
그리고 군교(軍校)는 하급장교인 군관 · 포교 등을 말한다. 이들은 지방의 군사 관계 뿐 아니라 경찰 임무를 담당한다. 토관(土官)은 함경도나 평안도와 같은 국방 요충지에 설치된 향리와 비슷한 성격의 직책이었다. 토관에는 그 지방에서 군사적 · 사회적으로 유력한 계층이 선발, 임용되었다.
양인(良人)은 상민(常民) · 평민 · 양민이라고도 부르며, 국민의 대부분을 점하는 농민 · 공장(工匠) · 상인을 지칭한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표어라든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 서열에서 보듯이, 전통사회에서 농업은 가장 중요한 생산활동으로서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직업 영역이었다. 전통사회에서 대부분의 양인은 농업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농민을 양인으로 간주할 수는 없는데, 농민 중에는 상당수의 공사노비(公私奴婢)들과 조선 후기에는 몰락양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양인농민은 법률적으로는 자유로운 신분으로서 양반과 동등한 토지 소유자가 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신분제의 틀 속에서 일상적으로 양반층으로부터 오는 경제 외적 강제를 감수해야 하였고, 토지 없는 농민이 되어 타인의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무전농민(無田農民)을 흔히 전호(佃戶)라고 하는데, 이들은 전주(田主)에게 매여 있으면서 대략 소출의 반을 바쳐야 하였다. 물론 자기 소유의 땅을 경작하여 그 소출의 10분의 1 정도를 국가 기관에 조세로서 납부하는 유전농민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소규모의 농업으로 영세함을 면하지 못하여 소작농으로 몰락해간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평산지방을 보면 무전농민이 10분의 3, 유전농민이 10분의 7로 보고되던 것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지역에 따라 농민의 70∼80%가 소작농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는 그 사이에 양반 지주에 의한 토지 겸병이 광범위하게 진행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농민이 기민화(饑民化) · 유민화(流民化)되어 가는 반면, 한편에서는 광작(廣作) · 요호(饒戶) 등으로 분류되는 비교적 윤택한 서민 지주가 형성되기도 하고, 농업 노동자인 고공(雇工) 또는 머슴이 널리 생겨났다. 양민 농민은 국가에 대한 예속민으로서, 조세 · 공납 · 군역 · 요역을 부담하였는데, 국가와 양반은 그들의 대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공장(工匠)은 관영 · 사영 수공업에 종사하는 이들로서,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으로 구별되며, 그 신분은 양인과 공천(公賤)으로 구성되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소(所)라는 천민특수마을의 주민이 각종 수공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시대에 와서는 중앙의 30개 관아에 예속된 2,800여 공장과 지방의 3,500여 외공장에서 관주도(官主導)로 생산되었다. 이 밖에 민간수공업도 있었는데, 도시에 거주하는 사공장(私工匠)들은 관역(官役)에 동원되는 기간 외에는 자신의 생활을 위한 전업적 수공업 활동을 하였다.
반면에 농촌에서는 전업적인 지방의 사공장이 농기구 등을 생산 판매하고, 농민이 부업으로서 가내 수공업에 종사하였지만, 그것은 자급자족적인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국가기관으로부터 공가(貢價)를 받은 특권 상인인 공인(貢人)이 수공업자에게 특정 상품을 선대제(先貸制) 형식으로 주문, 공급하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관영 수공업의 민영화가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전반기에는 공장제 수공업이 출현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광업에서도 진행되는데, 이전의 광산 개발은 주로 농민의 요역에 기초한 관영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17, 18세기경부터 물주제(物主制) · 덕대제(德大制) 형식으로 민영화되어 연군(鉛軍)이라는 광산 노동자를 출현시켰다.
상인(商人)은 시전상인(市廛商人), 육의전상인(六의廛商人), 행상과 보부상, 그리고 객주, 여각 등 유통 경제에 종사하는 전문적인 직업인을 말한다. 특히, 17, 18세기 이후에 발전한 여각 · 객주는 화물의 도산매업 · 화물보관업 · 위탁판매업 · 금융업 등을 겸하기도 하였다. 상업은 유교적 관념에 의하여 가장 천시되던 직업 영역이었으나 17세기 이후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그 중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부를 축적한 상인층은 부상대고(富商大賈)라 불릴 만큼 하나의 사회적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부상대고는 상업활동을 통하여 축적된 자본을 토지 구입에 씀으로써 동시에 지주로 상승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조업에 투자함으로써 산업 자본가의 원초적인 모습을 띠었다.
서울에서는 시전이라는 특권적 상인층이 유통망을 장악하면서 제조업도 그 휘하에 넣고 있었으며, 지방에서는 전국적으로 얽힌 장시(場市)의 그물망을 사상(私商)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고(都賈)라 하여 비교적 독점화되고 자본 규모가 큰 사상이 있어서 서울과 지방간의 거래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약 1,000개가 넘는 정기시(定期市)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상업의 신장은 조선 후기 사회의 동태(動態)를 가져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양인의 최하위에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 하여 신분은 양인이되 그 수행 직무는 천역인층이 있었다. 이른바 칠반천역(七般賤役)으로 일컬어지던 조례(皂隷) · 나장(羅將) · 일수(日守) · 조군(漕軍) · 수군(水軍) · 봉군(烽軍) · 역보(驛保) 등이 그들이다. 간(干) 또는 척(尺)으로 불리어진 다종다양한 천역도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특정 국가기관에 소속되거나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천인은 사회의 최하층 신분으로서, 노비 · 무당 · 광대 · 기녀 · 백정 등이 여기에 속한다. 노비는 양인과 함께 직접적인 생산 영역에 종사하는데, 소유주에 따라서 공노비(公賤)와 사노비(私賤)로 구분되며, 노비가호의 거주 방식에 따라 다시 솔거노비(率居奴婢)와 외거노비(外居奴婢)로 나누어진다. 공노비는 대부분 농업노동에 종사하였지만, 그 중에는 공장(工匠)으로서 수공업에 종사하던 이도 있었다.
사노비들은 가내에서 여러 가지 잡역에 종사하거나 주인의 농지를 경작하였다. 대부분이 사노비에 속하던 솔거노비는 흔히 무보수로 농사에 직접 사역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반면에 외거노비는 별도의 가구를 형성하면서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더러는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여 지대를 납부하였다. 승려 · 광대 · 무당 · 점쟁이 · 기녀 · 버들고리장 등도 노비는 아니지만 그 하는 직무는 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백정(白丁)도 천직으로 취급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도살업, 유기(柳器) · 제혁(製革) 등으로 생업을 영위하였다.
개항기 이전까지의 직업 구조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유교적 신분관 · 직업관에 의하여 직업의 서열이 매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히려 중시되는 상업 · 수공업 · 서비스업종은 유교적 직업관에서는 대체로 낮게 평가되었다.
신분제적 지배 질서를 흔들리게 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밑바탕으로 하여 개항기 이후 민족항일기가 끝나는 70여년 동안 우리 나라 사회는 자본주의로의 틀을 다져 나갔다. 비록 자주성을 상실한 채이기는 하나, 일본 제국주의를 통하여 세계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편입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 독특한 구조가 정착되어 갔다.
개항기로 일컬어지는 1870년대로부터 1905년 사이에 부각된 직업으로는 상업과 일용노동(日傭勞動)을 들 수 있다. 부산 · 인천 등 개항장과 그 인접 지역에는 미곡 · 우피 등을 수출하고, 대신 유럽과 일본으로부터 직물을 비롯한 각종 새로운 공산품을 수입하는 무역상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새로운 공산품은 국내의 장시와 보부상의 상업망을 통하여 전국으로 퍼져갔다.
한편, 부두의 하역 작업에 종사하는 일용 노동자가 출현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11년경 약 2만 2000명의 부두 노동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물론 전통사회에서도 은점(銀店) · 동점(銅店)에서 임금 노동자가 출현한 바 있지만, 근대적 의미의 임금 노동자의 효시는 부두 노동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어 철도와 도로의 부설에 상당수의 임금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1910년경에는 약 10만 명의 농민이 철도부설에 동원되었으며, 7,000명에 이르는 정규 철도 근무자가 있었다.
한편, 개항기에는 각종 개혁조치를 통하여, 근대식 군대가 창설되고 국가 기관도 근대식으로 탈바꿈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근대적인 직업 공무원군이 창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밖에 근대식 학교와 병원, 언론매체 등에 근무하는 3차산업 부문 종사자도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인구의 대부분은 아직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직업 구성에 있어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일제통치기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연도\직업 | 농림업 | 수산업 | 광공업 | 상업 | 공무 · 자유업 | 기타 유업자 | 무직 · 미신고자 | 양반 · 유생 | 합계(실수) |
---|---|---|---|---|---|---|---|---|---|
1910년 | 84.06 | 1.16 | 0.84 | 6.18 | 0.54 | 2.61 | 1.08 | 2.53 | 99.00(2,894,777) |
1917년 | 84.46 | 1.35 | 2.13 | 6.14 | 1.56 | 2.91 | 1.43 | _ | 99.98(3,107,219) |
1929년 | 79.25 | 1.58 | 2.34 | 7.01 | 2.83 | 5.22 | 1.76 | - | 99.99(3,518,094) |
1942년 | 66.64 | 2.08 | 7.39 | 8.59 | 4.33 | 10.72 | - | - | 99.75(4,451,659) |
〈표〉 일제강점기의 직업구성변화 (단위:%,명) | |||||||||
*자료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
〈표〉와 같이 32년 동안에 농업 종사자의 급격한 감소와 상공업 및 공무 · 자유업 종사자의 상당한 증가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기타 유업자(其他有業者)도 무척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해마다 많은 농민이 몰락하여 불안정한 노동에 종사하거나 광공업 노동자로 전락되어 간 것을 의미한다. 농민 몰락현상은 이러한 공업 노동자화, 부랑 노동자화 뿐만 아니라 소작농 · 머슴 · 농업노동자 및 해외 노동자로도 나타난다.
농민의 임금 노동자화는 식민지 공업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30년에 급격히 증가되었다. 그리하여 1943년경에는 약 175만 명의 임금노동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 내역을 보면 39만 명의 공장 노동자, 28만 명의 광부, 17만 명의 운수 노동자, 38만 명의 건축 노동자, 53만 명의 기타 노동자 등이다. 여기에 1944∼1945년 사이에 강제 노역된 약 4만 명의 노동자를 추가하면, 일제강점기가 끝날 무렵에는 약 200만의 임금 노동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표〉에 의하면 상공업으로의 전업자(轉業者)도 다수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소상인 · 행상 · 수공업자와 같이 영세한 자영업자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공무 · 자유업 종사자도 증가하고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하급 말단 공무원(雇員), 또는 자유업에 속하였다.
이와는 달리 또다른 한편에서는 지주로부터 산업 자본가로, 또는 상업 자본가로부터 산업 자본가로 전환한 소수의 식민지 부르주아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일제와 결탁하여 매판적 자본가로 기능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직업 구조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민족차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일본인과 우리 나라 사람의 직업 구조와 성질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일본인은 대부분 관공리와 근대적인 상공업 부문에 종사하고, 한국인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비록 상공업에 종사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분화되지 못한 원시적 성격의 산업이며, 대부분 영세한 자영업자였다. 그리고 다수의 실업 및 부랑 노동력이 산재해 있었으며, 비록 유업자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겸업 또는 부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들의 직업적 지위나 생활 수준이 대단히 나쁜 것임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유교적 신분관념이 상당히 약화되었고, 직업관 역시 근대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어 갔음을 볼 수 있다.
8·15광복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적 경제질서가 관철되어 왔다. 특히, 1960년대 이후 25년간 수입대체 및 세계시장을 겨냥한 공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현대 직업 구조는 산업사회 특유의 형태로 형성되어 왔다.
2000년 1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국민계정의 기준년을 1990년에서 1995년으로 바꾼 후 우리 경제의 변화추이를 분석한 결과 우리 나라 생산구조는 농림어업 비중이 1970년 27.1%에서 1998년 4.9%로 크게 낮아졌으나 제조업은 21.2%에서 30.7%, 서비스업은 33.9%에서 41.1%로 각각 상승했다.
제조업 가운데 섬유, 신발 등 경공업 비중은 1970년 60.1%에서 1998년 23.1%로 급속히 낮아진 반면 중화학 공업 비중은 중화학 위주의 산업 정책 등으로 크게 높아졌다.
현재 우리 나라 직업 체계는 통계청에서 발간된 ≪한국표준직업분류≫(1999)에 의하면, 대분류 11개 항목, 중분류 46개 항목, 소분류, 162개 항목, 세분류 447개 항목, 세세분류 1,404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 중 대분류 항목은 의회의원 · 고위임직원 및 관리자, 전문가, 기술공 및 준전문가, 사무 종사자, 서비스 종사자, 판매 종사자, 농업 및 어업 숙련 종사자, 기능원 및 기능 관련 종사자, 장치 · 기계조작 및 조립 종사자, 단순노무 종사자, 군인으로 나뉜다.
한국표준직업분류는 직업관련 통계 작성을 위한 기준으로서 생산적인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개별 근로자의 각종 직무 수행 형태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한 것이다. 한국표준직업분류는 1963년 ILO분류를 기초로 제정된 이래 1992년까지 4차 개정되었으며, 정보통신 및 서비스 산업의 발달에 따른 직업구조의 변화를 반영하기 위하여 5차 개정작업을 1998년 7월부터 추진하여 2000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한편 1999년 노동부 중앙고용정보관리소가 발간한 ≪한국직업사전≫에는 약 1만2000여 개의 직업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직종이 다수 열거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직업사전은 1969년 인력개발연구소가 당시 경제기획원, 과학기술처, 노동청의 감리를 받아 대표 직종명 3,260여 종을 분류하여 발간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 사전은 모든 직업을 국제 표준직업분류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였으며, 직업마다 직무개요, 수행방법, 기계장치, 자재 및 제품, 자격면허, 별명 · 유사직명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급속한 산업화의 진전으로 직업의 세계가 매우 복잡다기해짐에 따라 1979년 7월에 국립중앙직업안정소가 설립되어 각종 직업관련 정보의 조사 ·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그 첫번째 주요 과제로 직업사전 편찬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1986년에는 그 결실을 보게 되어 1만 451개 직업을 조사 · 정리 · 수록하여 한국직업사전 제 1판을 발간하게 되었다.
한편 산업 및 경제 구조의 변화와 신규직업의 발생 등 직업세계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하여 1987년 이후에도 연차 계획에 따라 산업 분야별로 직무 분석 사업을 꾸준히 추진, 1987년부터 1994년도까지 2,500여 개의 사업체 현장 직무 분석을 통하여 1만여 개의 직업을 정리 · 수록하여 개정판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