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숭조는 생전에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시 1수와 소(疏) 1편만 남은 채 거의 다 유실되었다. 다만, 중종의 특명에 의해 간행된 『대학잠(大學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만이 세상에 전한다. 이 책은 후손들이 유숭조와 관련된 자료를 여러 문적(文蹟)에서 수집해 제1책에 싣고, 다시 『대학잠』과 『성리연원촬요』는 제2책에 수록해 2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유숭조의 유집은 이 책이 간행되기 전 후손 유염(柳剡)·유시형(柳時亨)·유양구(柳養九) 등에 의해 중간되는 등 몇 차례 인출된 바 있다. 이 책이 간행된 연대는 철종 때 유숭조에게 이조참판을 증직한 내용이 실린 것과, 제2책의 말미에 “안동의 본손가(本孫家)에서 무진년(戊辰年) 10월에 중간한다.”는 등의 기록을 참고할 때, 1868년(고종 5)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분권 2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제1책의 권두에는 정범조(丁範祖)와 정종로(鄭宗魯)의 서문이 있고, 이어서 후일 작성된 「진일재선생연보」가 실려 있다. 그리고 ‘진일재선생유집’이라는 이름 아래 시 1수, 소 1편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부록으로 유숭조의 신도비명·행장·묘지명·유사(遺事), 정수강(丁壽岡)의 만사(輓詞) 1수, 유순(柳洵)의 「대학강목잠발(大學綱目箴跋)」, 유념(柳淰)의 「진대학십잠성리연원소(進大學十箴性理淵源疏)」, 김응조(金應祖)의 「대학십잠성리연원촬요중간후지(大學十箴性理淵源撮要重刊後識)」, 『국조보감』 등에서 유관 자료를 뽑은 「기문록(記聞錄)」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김도행(金道行)과 유범휴(柳範休)의 발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뒤에는 다시 부록으로 「증시교지(贈諡敎旨)」·「예조회계(禮曹回啓)」·「시장(諡狀)」 등 유숭조에 관련된 후기 자료가 첨부되어 있다.
제2책에는 『대학잠』과 『성리연원촬요』가 수록되어 있다. 이 두 저술은 유숭조가 60세 때 성균관대사성으로 있을 당시 중종에게 지어 올린 것이다.
『대학잠』은 「명명덕(明明德)」·「작신민(作新民)」·「지지선(止至善)」·「사무송(使無訟)」·「격물치지(格物致知)」·「근독(謹獨)」·「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치국(齊家治國)」·「혈구(絜矩)」 등의 10잠(箴)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격언지론(格言至論)으로서 원래는 제왕(帝王)의 치도(治道)를 위해 쓰인 것이지만 경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명명덕잠」 가운데 ‘이동기협, 사단지정, 기동이수, 칠정지맹(理動氣挾, 四端之情, 氣動理隨, 七情之萌)’이라는 이동기동(理動氣動)의 논리는 이황(李滉)의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논리와 맥을 같이하는 대목으로 주목되는 발언이다.
『성리연원촬요』는 서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주역』에서부터 송대의 제유(諸儒)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의 연원이 되는 주요 내용들을 발췌·편찬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이 정몽주(鄭夢周)에서 창시되었다고 하지만, 정몽주 이후 이황 이전은 저술이 후세에 전하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 학문적 경향이나 조예를 파악하기가 몹시 어렵다. 이 책은 바로 그 기간에 이루어진 저술로서, 학문의 순정성(純正性) 여부를 떠나 당시 성리학의 연원과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