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훈련원정으로 전투에 참전한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훈련원정의 신분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한후장(捍後將)이 되어 거제·옥포·한산·합포·마산포·가덕도·당항포·웅포 해전 등 남해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그 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의 관군마저도 무너진 상태에서 의병을 결성하기 위해 아들 최언립(崔彦立)·최후립(崔厚立)과 심지어 가노(家奴)까지 총동원하는 비장한 각오로 의병 수천 여명을 모아 모의장군(募義將軍)이란 기치(旗幟)를 달고 의병장으로 나섰다.
특히 순천·광양·고흥·보성 등 20여 곳에서 송대립(宋大立)·전방삭(全方朔)·김덕방(金德邦)·황원복(黃元福) 등과 함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으로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 6월 전라남도 보성의 안치전투(鴈峙戰鬪)에서 적을 추적하던 중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이 곳의 지명을 ‘군머리[軍頭]’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훈과 추모
그러나 후대 대학자 안방준(安邦俊)을 비롯해 유학 문희순(文希舜)정진하(鄭振河)·이유성(李儒誠)·임흥재(任興材)·안협(安浹) 등 도내 사림(士林)들과 후손들이 여러 차례 상서해 1752년(영조 28) 형조참의에 추증되고, 토지와 함께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졌으며, 정충사(旌忠祠)에 제향되었다.
이어 두 아들 최언립·최후립은 선무공신록에 책록되고, 손자 최강(崔崗)·최현(崔峴)·최곤(崔崑)도 병자호란 시 창의해 삼대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한 가문으로 역사에 남게되었다.
그 뒤 민몰되어진 그의 유적과 유물을 복원할 길이 없었지만 그의 충혼을 기리려는 도민들의 열의로 1992년 그가 최후의 전투를 치르다 전사한 곳(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군두)에 충절사(忠節祠)를 건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은봉전서(隱峯全書)』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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