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추쇄경차관,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진백(眞伯)
광간자(狂簡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54년(단종 2)
사망 연도
1504년(연산군 10)
본관
탐진(耽津)
출생지
나주
주요 관직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홍문관교리
관련 사건
무오사화|갑자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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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추쇄경차관,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나주 출신.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8년(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申從濩)와 더불어 문명을 떨쳤고, 김굉필(金宏弼) 등 동학들과 정분을 두터이 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82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곧 교서관저작 · 박사, 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 서거정(徐居正) 등과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 그 속의 논(論) 120편의 집필을 담당했는데, 그 논지가 명백하고 정확하다 하여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완성하는 단계에서 참여하였다. 이 해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이어 홍문관교리로 임명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487년 제주 등 3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다음 해 초에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곧 고향으로 급히 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다. 이에 43인이 탄 배는 14일 동안 동지나해를 표류하다가 해적선을 만나 물건을 빼앗기는 등 곤욕을 치르고 결국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台州府臨海縣)에 도착하였다.

처음 왜구로 오인되어 몰살당할 뻔했으나 어둠을 이용, 빠져나와 조선 관원이라는 것을 간신히 승복시켜 일행은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그는 상신(喪身)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가의 예와 윤리의 원칙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성종은 8,000리 길을 거쳐온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기술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무르면서 기술했는데 이것이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3권이다. 그리고 곧 고향으로 달려가 여막을 지키다가 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삼년상을 지냈다.

1491년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사헌부에서 서경(署經)을 거부하여 1년 후에 홍문관교리로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말썽이 많아 결국 승문원교리로서 낙착되고 말았다. 말썽의 골자는 친상을 당한 그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장 고향으로 달려가야 할 것인데도, 아무리 군명(君命)이라 할지라도 한가하게 기행문이나 쓰고 있었던 것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관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찬성과 반대가 들끓었는데, 성종의 두호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명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사헌부 · 사간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행정부 및 홍문관의 세력과 대립한 데에서 빚어진 바 컸다.

그 뒤 그는 연산군 때 일찍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水車) 제도를 관개(灌漑)에 응용하는 시도도 했고, 또 질정관(質正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연산군의 잘못을 극간(極諫)하고 공경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다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갔으며 여기서 6년을 지내다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그의 표류기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에 여러 가지 판본과 사본이 통용되고 있었으며, 일본어 번역본까지 나왔는데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1769년(영조 45)에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허암유집(虛庵遺集)』
『이평사집(李評事集)』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점필재집(佔畢齋集)』
『해동잡록(海東雜錄 )』
「금남표해록」(『연행록선집』 하, 성균관대학교대 동문화연구원, 1962)
「성종조 최부의 표류와 표해록」(고병익, 『이상백박사회갑기념논총』, 1964 ; 『동아교섭사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0)
「메스킬 금남표해록역주 서평」(고병익, 『동양사학연구』1, 1966 ; 『동아사의 전통』, 1976)
『표해록』(최기홍 역, 서울, 1979)
『策彦入明記の硏究』上·下(牧田諦亮, 京都, 1959)
Choe Pu’s Diary, A Record of Drifting across the Sea, Translated with Introduction and notes(Meskill, J., Tuscon, 1965)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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