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초에 홀치(忽赤: 宿衛 군사)에 소속되어 왕의 측근에 있게 되었으며 교위(校尉) 김시열(金時悅)의 딸을 임금에게 바쳐 총애를 받게 되었다.
1282년(충렬왕 8)에 서해도안렴(西海道按廉)이 되어 아첨한다는 평을 들었으며, 1304년에는 한희유(韓希愈)·오연(吳演) 등과 국사를 의논하게 되었는데, 이를 별청(別廳)이라고 불렀다.
1305년 11월 다른 승지가 경상도기은별감(慶尙道祈恩別監)으로 가게 되었는데 구전(口傳)이라 속이고 자기가 가려다가 발각되어 우승지에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1월에는 다시 승지에 복직되어 원나라에 가서 하정(賀正)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