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민

  • 예술·체육
  • 인물
  • 현대
해방 이후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역임한 체육인.
인물/근현대 인물
  • 사망 연도1983년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930년
  • 출생지평안남도 대동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재남 (전 동국대학교, 영문학)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해방 이후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역임한 체육인.

내용

1930∼1983. 평안남도 대동 출신. 어려서부터 축구에 재질을 보였으며, 평양 종로국민학교와 평양 체신전문학교를 다니면서 배구·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1·4후퇴로 남하하여 육군특무부대인 CIC팀에 입적하였으며, 김용식(金容植)에 의해 대표선수로 발탁되어 1952년부터 10여 년간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였다.

1962년부터는 육군방첩부대 축구단 코치로, 또는 국가대표급 선수로 망라된 양지(陽地)팀(1966∼1969) 및 국가대표팀 감독(1976∼1977)으로 축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국가대표선수 중 최장신으로 제공권(制空權)을 독점하다시피했으며, 체력면에서도 주력이 뛰어나 육상선수에 도전할 만한 준족(駿足:빠르게 잘 달리는 사람)을 지녔다.

국제적으로는 걸음마 단계였던 1950년대 한국 축구를 아시아의 강자로 승격시키는 데 큰 몫을 한 그에게 ‘아시아 황금의 다리’, ‘동양 제일의 다리’ 등의 별명이 붙었으며, 일본·홍콩·동남아시아 등 가는 곳마다 아시아 축구팬의 동경을 한몸에 모았다.

24회에 걸친 해외 원정 중 70여 점을 득점한 그는 철저하고도 피눈물나는 체력관리로 자신을 키웠다. 날마다 이른 새벽에 남모르게 로드워크를 하거나 등산로 또는 운동장에서 크로스컨트리 연습에도 열중했으며, 팀 훈련이 끝나면 자신의 보충 트레이닝은 물론 후배들의 개인 지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나라가 1954년 마닐라아시아경기대회와 1958년 동경아시아경기대회, 1956년과 1960년의 제1회 및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연거푸 우승한 것은 주전 골게터였던 그의 뛰어난 활약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퇴 후 경평전(京平戰)에 평양축구팀 대표로 또는 조기축구회를 통하여 축구 저변화에 기여하였다.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1983년 10월 인천전국체전에 출전한 이북5도 대표팀의 감독으로, 입원중임에도 불구하고 몰래 빠져 나와 선수들을 독려, ‘볼과 함께 살다간’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