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1933년 이전에는 곡물을 포함한 모든 농산물의 가격은 자유시장 기능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나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이 지속되면서 군량미 수요가 급증하고, 이어 1939년 우리 나라와 일본에서 있었던 한발로 인한 극심한 흉작 때문에 군량미를 포함한 전체 식량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일제는 일본으로 수출할 미곡을 확보할 목적으로 곡물시장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우선 <미곡통제법 米穀統制法>을 제정하여 미곡의 자유거래를 억제하는 한편, 이어 <조선미곡통제령 朝鮮米穀統制令>을 반포하여 단일공정가격제(單一公正價格制)를 실시함으로써 유통 및 소비를 강력히 한 통제하고, 우리 나라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강제조처는 식량사정을 완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유통질서를 문란케 하였으며, 특히 저렴한 지불가격은 생산농가의 생산의욕을 계속 감퇴시킴으로써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1943년 8월 <조선식량관리령 朝鮮食糧管理令>이 공포되어 식량 전반에 걸쳐 가격통제와 수량통제가 가해졌다.
광복 직후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 쌀의 자유시장을 인정하기로 하고 통제를 전면 해제했으나, 쌀값의 등귀 및 매점매석 때문에 식량위기가 다시금 고조되자 1946년 2월, 미곡자유시장 폐지를 공고하고 긴급법령으로 1945년산 쌀의 수집령을 선포하였다.
또한, 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도 정부는 <미곡법>을 제정, 공포하여 양곡공출과 배급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식량의 직접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미곡수집제도는 식량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처였으나, 정부 매상가격이 시가보다 지나치게 쌌을 뿐만 아니라 비농산물 가격이 급속도로 올랐기 때문에 희생당하는 처지인 농민들이 수집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수집기피현상에 대한 대책으로 제정, 공포된 것이 1948년 10월에 공포된 <양곡매입법>이었다. 이 법은 양곡 자유시장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대로 전면 통제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6·25전쟁 후 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통화팽창 방지와 관리양곡 확보라는 이율배반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1951년 9월<임시토지수득세법>을 제정, 공포하여 토지수익에 대한 조세는 현물로 바치도록 하는 한편, 양곡과 비료를 현물로 교환하는 양비교환제(糧肥交換制)를 새로이 실시하였다.
1955년 체결된 미공법 제480호(PL-480)에 따른 잉여농산물 도입은 식량의 안정된 공급과 전반적인 경제안정에는 기여했으나, 싼 값으로 인한 생산의욕 저하와 농업 부문에 대한 투자에 역기능을 하였다.
또, 1958년도부터 실시된 미곡담보융자제도(米穀擔保融資制度)는 일종의 상품담보융자(商品擔保融資)로서 미곡 생산농가를 대상으로 미곡을 담보로 매입가격의 65∼90%를 융자함으로써 수확기 과잉출하로 인한 곡가하락을 방지하고, 단경기에는 융자금을 회수함으로써 곡가 앙등을 억제하여 곡가안정을 이룩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정부는 <농산물가격유지법>을 공포하였다. <농산물가격유지법>은 농산물가격이 생산비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농가 경제 향상과 농업생산 증대를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농산물가격 유지정책은 농가소득 향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1965년 전후에 정부의 중농정책이 퇴보하면서 농산물 가격은 낮은 수준에서 맴돌게 되었다.
그러나 1973년 후반기에 나타난 석유파동과 세계 식량파동을 앞뒤로 하여 경제가 불경기의 침체상태에 빠지자, 정부는 경제개발계획 기간중 농업생산성 확충과 통일계 다수확 품종의 확대 및 보급을 추진하는 동시에 미맥수매가(米麥收買價) 인상과 이중곡가제도 강화에 정책의 초점을 두었다.
또한, 정부는 주곡의 획기적 증산이 이루어지면서 추곡과 하곡의 최성출회기(最盛出廻期)의 가격하락을 방지하고, 농가의 증산의욕을 높이는 동시에 농가소득 증대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 수매규모를 계속 확대하는 한편, 수매가격도 대폭 인상하였다.
수매정책과 관련하여 정부는 일시 집중출하(一時集中出荷)로 인한 보관상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수매자금의 방출을 분산시키고자 농가별로 수매량과 출하 일정을 사전 통보하는 시차수매제(時差收買制)를 1977년산 추곡부터 실시하였다.
1950년의 ‘양곡관리법’에서는 수매량과 수매가격을 국회동의를 얻어 정부가 결정하도록 하였으나, 1972년에는 국회동의제를 폐지하고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승인하도록 개정하였다. 그러나 1988년의 법개정으로 국회동의제가 다시 부활되었다.
정부의 쌀수매량은 197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총생산량의 10% 미만이었으나 1971년부터 10%를 상회하기 시작하였고, 통일계 벼의 재배가 최고조에 달한 1977∼1979년에는 23.4%의 수매비율을 보였다.
그 이후 다소 감소추세를 보이다가 국회동의제가 부활된 1989년의 경우는 수매량이 약 1천200만 석으로 총생산량의 28.7%에 달했다. 그 이후 1997년 현재 900만 석 내외의 수매량을 유지하여, 수매비율은 25% 정도에 이르고 있다.
농민들로부터 사들이는 수매가격보다 판매가격이 오히려 낮은 이중가격제도가 실시되기 시작한 1973년 이후부터 쌀의 수매가격은 쌀생산비에다 약간의 소득보상까지 감안하여 결정되고 있으나 해마다 쌀 생산비의 산정에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이와 같은 추곡수매제도는 그 동안 쌀값 안정이나 쌀 수급조절 및 농가 소득증대에 나름대로 기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수매제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방출제도의 한계로 양곡관리의 재정규모와 관리적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 민간유통기능이 위축되는 등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의해 양곡수매에 따른 총 보조상당액(AMS)을 매년 일정수준 감축해야 하므로 현행 수매제도를 계속 유지 시 2002∼2003년 이후에는 농가소득지지와 적정 비축물량 확보에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에 대비하여 추곡수매제도를 쌀 생산농가의 소득을 보장하고 민간유통기능을 활성화하면서 한편으로 세계무역기구 규정에 합치되도록 개정 추진하고, 현행 추곡수매 중 농협 차액 수매를 시장기능이 중심이 되는 수매제도로 단계적으로 전환하되 미곡종합처리장 등 민간업체가 농지와 융자가격·물량 등을 계약하여 수매하고 가공·판매 후 정산하는 융자수매방식 도입방안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추곡수매제도는 2005년 2월 폐지되고 공공비축제가 도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