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쿠웨이트국(State of Kuwait)이며, 페르시아만 연안에 걸프만에 위치하는 중동 국가로 해안선의 길이는 499㎞이다. 면적은 1만 7818㎢, 인구는 278만 8534명(2015년 현재), 수도는 쿠웨이트(Kuwait)이다. 국토 외에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중립지대에 5700㎢의 영토가 있다.
종족구성은 쿠웨이트인은 전인구의 45%에 불과하며, 그 외에 아랍인 35%, 남아시아인 9%, 이란인 4% 등이다. 언어는 아랍어가 공용어이나 영어도 사용되며, 종교는 전인구의 85%가 이슬람교를 믿으며, 그 중 3분의 2 이상이 수니파이다. 기타 기독교와 힌두교를 믿는다.
기후는 열대성 사막기후로, 이 나라 경제의 특색은 총 1000억 배럴에 달하는 세계 제2위의 석유매장량을 바탕으로 한 석유의존체제라는 점이다. 쿠웨이트는 이를 재원으로 세계에서 완벽한 사회보장제도를 구비하고 활발한 정부주도 경제개발을 추진하여 중동지역에서 비교적 발전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외국인 노동력 의존에 따른 부작용과 유가 인하에 따른 재정수입 감소로 개발 계획을 전면 재조정하는 등 경제성장이 둔화되었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344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2719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아미르(Amir)로 불리는 국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국왕중심제 입헌군주국으로, 의회는 임기 4년의 국민의회(50석)가 대행하며, 정당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에는 기원전 3500년경부터 교역이 활발하였으며, 7세기경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16세기 이전부터 터키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18세기 초 아라비아 내륙으로부터 아나이자족(Anaiza)이 이주하여 오늘날 쿠웨이트 민족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1756년 사바왕국을 건설하고 페르시아만을 무대로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하였으며, 이주 당시 황무지를 개척하여 쿠트(Kut)라고 불리는 정착요새를 만들어 이로부터 ‘쿠웨이트’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1897년 7대 무바라크왕은 터키의 쿠웨이트합병을 피하기 위하여 동인도에 진출 중이던 영국에 지원을 요청하여 1899년 1월에 영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였고, 1901년 영국 · 터키간 협정에 의하여 쿠웨이트의 현상유지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받음으로써 영국의 반(半)식민지로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1961년 6월 19일 영국과의 보호조약을 폐기하고 명실상부한 주권국으로 독립하였으며, 1962년 11월 11일 헌법을 제정하였다. 1963년 유엔에 가입하였고, 1964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쿠웨이트는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아랍 국가간의 단결을 도모하고 아랍국간의 분쟁 중재 역할을 활발히 수행함으로써 자국의 국제적 지위 격상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 1990년 이라크의 침입으로 점령당하였다가 1991년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2006년 1월로부터 2020년 9월까지 사바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Sabah al-Ahmad al-Jaber Al-Sabah)가 국왕으로 지냈고, 2020년 10월로부터 나와프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Nawaf al-Ahmad al-Jaber Al-Sabah) 왕세제가 그의 뒤를 이어서 국왕으로 지냈다. 2023년 12월 16일 나와프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가 향년 86세로 사망하고, 현재는 2021년부터 쿠웨이트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지내던 메살 알-아흐마드 알-사바(Meshal al-Ahmad al-Sabah) 왕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하여 통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61년 12월 신생 쿠웨이트를 승인하고 양국간 외교관계수립을 제의하였으나, 쿠웨이트측은 분단국에 대한 등거리외교정책을 내세워 남북 어느 일방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거부하여 왔다.
이후 우리나라는 1969년 12월 쿠웨이트에 대한무역진흥공사 사무소를 설치하고, 1972년 7월 이를 흡수하여 통상대표부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양국간 경제 · 통상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다각적인 외교관계 수립노력을 펼쳤다. 그 결과 1979년 6월 11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으며, 그 해 7월 쿠웨이트에 우리나라 대사관이 개설되었고, 2015년 현재 유지되고 있다.
양국은 1981년 1월에 항공 협정, 1983년 2월에 5개년문화 협정, 1983년 6월에 체육교류협정, 1983년 8월에 경제기술협력 · 무역증진 협정, 1984년 2월에 통상증진 및 경제기술협력 협정, 1984년 12월에 항공운수면세 협정, 지정항공사의 활동과 정비에 대한 조세와 관세면제 협정, 1985년 12월에 항공운수면세약정, 1987년 2월에 정보기술 협정, 1999년 3월에 투자보장 협정, 2000년 5월에 이중과세방지협약비준서 교환, 2004년 11월에 군사교류 및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 또는 교환하였다.
1975년 5월에는 재쿠웨이트한인회가 발족되어 교민친선 도모 및 한인학교 지원 등 사업을 하고 있으며, 한인학교는 1981년 10월 1일 개교하여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양국은 또 1980년 9월 문화협조협정을 체결한 후 유학생 및 스포츠팀의 상호교환 및 예술공연의 상호교류 등을 규정하고 문화교류 확대를 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해외건설 분야에서 쿠웨이트는 사우디아라비아 · 리비아 · 이라크와 함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설시장이다. 1975년 1월부터 쿠웨이트에 진출하기 시작한 우리 해외건설은 대림산업주식회사가 정유공장 기계정비공사를 46만 달러에 수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70년대 말까지는 막대한 석유수입을 배경으로 한 경제개발정책의 추진에 힘입어 우리 나라 해외건설수주액은 증가하였다. 특히, 슈아이바(Shuaiba) 항만국이 발주한 항만확장공사는 1억 1200만 달러 규모였다. 이 공사는 현대건설주식회사가 1977년 6월 18일부터 1979년 12월 29일까지 수행하였는데, 이는 당초의 계약 공기(工期)를 6개월이나 단축시킨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콘크리트블록 설치작업을 원만하게 수행해냄으로써 이 분야에 오랜 경험을 가진 영국의 설계 · 감독회사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해외건설과 관련하여 쿠웨이트에서 국내로 송금된 외화입금액은 우리나라 국내 외환고를 높이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고, 쿠웨이트 활동하는 건설인력과 건설시장에서 사용중인 장비 등은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제1차 석유위기 이후 우리나라는 매년 쿠웨이트로부터 6억 달러 내외의 원유를 도입하였으며, 이 수입액은 제2차 석유위기가 시작된 1979년에는 11억 5000만 달러, 1980년에는 17억 5000만 달러로 최근까지 매년 크게 증가하였다. 우리나라의 대 쿠웨이트 수출액은 2015년 현재 9억 24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자동차, 철강, 전지전자제품 등이고, 수입액은 89억 73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원유와 유류제품 등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49명의 쿠웨이트선수단이 참가하였다. 2015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현대, 삼성, 대림, 풍림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약 1,600명의 한국교민이 있다.
한편, 북한은 1967년 9월 쿠웨이트와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이듬해 3월에 무역사무소를 설치하였다. 1970년 11월에는 이를 통상대표부로 승격시켰으며, 2001년 4월 4일 정식 외교관계를 체결하였다. 양측은 1967년 9월에 무역 협정, 1979년 10월에 문화협조 협정을 체결하였다. 1976년 11월 북한은 중국 주선으로 민간 차원의 차관교섭 및 건설수주단을 쿠웨이트에 파견하였으나, 수주능력을 의심받아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