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 관제를 개신할 때 내의원(內醫院)에 제거(提擧)와 태의(太醫)를 두었다.
다음해인 1895년 5월에 궁내부관제(宮內部官制)를 다시 개정하여 내의원을 전의사(典醫司)로 고쳐 시종원(侍從院)에 속하게 하였다. 그 뒤 다시 관제를 개정하여 1897년 1월에 전의사를 태의원으로 개칭하고 다음과 같은 관원을 두었다.
즉, 태의원에는 도제조(都提調) 1인, 경(卿) 1인, 소경(少卿) 1인, 전의(典醫) 3인, 전의보(典醫補) 5인, 주사(主事) 2인 등을 두었다.
1905년 3월 칙령 제126호로 태의원관제를 또다시 개정하였는데 도제조 1인, 경 1인, 부경(副卿) 1인, 전의 10인, 제약사(製藥師) 1인, 이밖에 1903년에는 기사(技師)를 두었으며, 1910년 이후 이왕직전의국(李王職典醫局)으로 되었다. 당시 왕실의 진료는 주로 전의인 한의(漢醫) 출신이 맡았다.
그러나 1885년에 미국인 알렌(Allen,H.N.)에 의하여 왕립병원이 설치된 후에는 그 때 병원에서 같이 일하던 미국 여의사들이 이미 궁내부 촉탁의(囑託醫)로서 궁중에 출입하였으며, 1902년 1월 궁정의(宮廷醫)로서 독일 여의사 부사언(富士彦)이 초빙되었다가 19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 뒤 일본 여의사 다카하시(高橋裕子)가 초빙되었고, 또 영국 여의사도 내임한 바가 있었다. 또, 일본인 의사 고야마(小山善)·스즈키(鈴木兼之助)의 이름도 관보에 보이고융희(隆熙)연간에는 의학교 교관 안상호(安商浩)도 촉탁의로서 궁중에 출입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궁내에서도 서양의학에 의한 요법(療法)이 병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