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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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 유적 발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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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군 화천댐 파로호(破虜湖) 수몰지역에 있는 석기시대 고인돌군 · 흑요석 석기 등이 등이 출토된 복합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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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강원도 화천군 화천댐 파로호(破虜湖) 수몰지역에 있는 석기시대 고인돌군 · 흑요석 석기 등이 등이 출토된 복합유적.
내용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86년 12월부터 ‘평화의 댐’을 북한강 상류에 건설하기 위해 하류에 있던 파로호의 물을 퇴수시키려고 화천댐의 수문을 열자 파로호 바닥에 있던 유물들이 노출되면서 시작되었다.

파로호는 화천댐이 1942∼1944년에 만들어지면서 생긴 인공호수로서 건설될 당시 화천·양구지역의 3개면 20여 개 마을과 인근지역 38.9㎢가 수몰된 곳이다. 당시 수몰대상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문화유적에 대한 일체의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파로호의 물을 빼내게 되자 전체 수몰지역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넓은 지역이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퇴수지역에서는 1942년까지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흔적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와 더불어 선사·유사시대의 각종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북한강 상류지역에도 당시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강원대학교에서는 1987년 1월부터 퇴수지역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양구읍 고대리·공수리지역에서 많은 고인돌 유적을 발견하게 되었고, 4월 9일에 이르러서는 양구읍 상무룡리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상무룡리(上舞龍里)는 화천댐이 생기기 전에 허수리(許水里)라고 부르던 마을로 1942년까지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물이 빠지자 옛날 집의 주춧돌·돌담·우물터·가로수 등의 흔적이 노출되어 당시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1987년 1월부터 시작된 지표조사의 결과가 고고학계에 인정되어 1987년 10월 21일부터 12월 15일까지 1차 발굴조사, 1988년 10월 5일부터 10월 11일까지 정밀지표조사사업과 그에 이어 10월 14일부터 12월 12일까지 2차 발굴조사, 1989년 4월 15일부터 5월 30일까지 3차 발굴조사가 강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양구의 서천(西川)과 수입천(水入川)을 끼고 있는 길이 10㎞의 강가에서 15개소가 발견되었다. 또한 서천과 북쪽 회양과 금강산에서 내려오는 북한강이 합류하는 합수머리 일대인 서호(西湖)·모일(暮日)·산곡(山谷)·동촌(東村)·반구뫼·신내·병풍골 등에서도 구석기들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파로호 수몰지역이 구석기시대 유적의 보고임이 밝혀졌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은 양구읍 고대리에 5기, 하리에서 고대리로 이어지는 3㎞의 강기슭에 18기, 고대리의 새말 서천 옆 모래톱에 8기, 주막거리에 11기, 공수리에 2기 등 40여 기가 있었다.

고인돌이 발견된 곳은 모두 1942년 이전에 양구읍 앞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고대리에서 다시 서쪽으로 꺾여 화천읍으로 흘러 내려가는 서천을 끼고 있는 지역이다. 화천댐의 만수위인 해발 181m가 되면 대부분의 고인돌이 물 위로 노출되고 있었다.

고대리에 있던 고인돌 1기는 파괴될 것을 염려해 인근 언덕으로 옮겼다. 덮개돌의 크기는 둘레 11.7m, 남북 3.5m, 동서 3.7m, 두께 0.78m이다. 받침돌[支石]의 크기는 높이 0.85m, 가로 1.8m, 세로 0.59m, 두께 0.3m로서 2개가 덮개돌을 받치고 있다.

이 고인돌의 무게는 약 21으로 200명의 장정이 힘을 합해야 움직일 수 있는 중량이다. 따라서 이 고인돌이 축조되었던 청동기시대 양구 일대의 인구는 약 800∼1,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인구는 청동기시대의 성읍국가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숫자로서 당시 사회구조의 규모를 밝힐 수 있는 자료이다.

발굴조사를 실시한 상무룡리 구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우리 나라 고고학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구석기는 흑요석(黑耀石)으로 만든 석기 250여 점을 포함해 8,000여 점에 달한다.

출토된 석기들은 지질·형태분류·타 유적의 석기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제1문화층은 후기 구석기시대인 2∼5만년 전으로, 제2문화층은 7∼12만년 전의 중기 구석기시대이거나 그 이전 시기로 추정할 수 있었다.

석기는 주먹도끼·찍개·찌르개·사냥돌·긁개·밀개·자르개·째개·주먹까뀌·주먹대패·주먹괭이·새기개·뚜르개·톱날·돌망치 등이 있었다.

용도별로 구분하면, 사냥용 석기 5.8%, 부엌용 석기 21.4%, 가죽·뼈·나무다루는 석기 2.7%, 연장석기 4.9%, 기타 석기가 65.2%였다. 석기의 암질은 석영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나 반암·규장암·판암·흑요석으로 만든 것도 일부 있었다.

특히, 구석기 중에는 왼손잡이가 사용한 것이 있었다. 긁개의 9.8%, 밀개의 8.8%가 왼손잡이용이었다. 이로 보아 구석기인들 중에도 왼손잡이가 8∼10%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무룡리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를 분류, 통계한 것을 보면, 이 곳에서 생활했던 구석기인들은 석기를 제작할 때 재료는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석영을 많이 사용했으며, 다른 지방에서 가져온 것으로 생각되는 흑요석·판암 같은 돌은 비교적 적었다. 이 점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거나 교환하여 사용한 재료는 적었다.

유적에서는 석기제작용 공구들과 제작과정 중에 생기는 부스러기·덜 된 연모·격지·몸돌 등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이 곳에서 오랜 동안 석기제작을 하면서 생활했음을 증명한다.

파로호의 상무룡리 구석기 유적은 우리 나라 구석기문화를 대표하는 공주 석장리, 연천 전곡리 유적과 함께 구석기문화의 양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이 곳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선사인들이 석기를 만들 때 쓰던 귀중한 석재로 그들이 이동하면서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선사시대의 문화전파·교류는 물론 인류의 이동관계까지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 나라 선사시대의 흑요석 석기는 함경북도 회령, 경상남도 통영 상노대도(上老大島), 부산 동삼동, 강원도 양양 오산리의 신석기 유적과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함경남도 웅기 굴포리, 충청남도 공주 석장리, 충청북도 단양 수양개, 경기도 양평 교평리, 연천 전곡리와 신답리에서 발견되었다.

이것들과 상무룡리 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을 중성자방사화방법(neutron activation analysis)으로 성분분석을 한 결과, 상무룡리·전곡리·교평리·오산리의 흑요석은 백두산계로 밝혀졌다.

상무룡리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백두산에서 양구로 옮겨왔을 가능성이 많다. 이 흑요석제 석기의 전파경로를 집중적으로 추적, 연구한다면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의 사람과 문화의 이동관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상무룡리 유적의 발굴은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 구석기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고, 우리 민족의 구성과 기원연구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석기의 제작수법이나 형태가 연천 전곡리 유적과 비슷한 점이 나타나고 있고, 중국·시베리아·일본지역의 구석기 유적과도 연관성이 있어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한국 구석기문화의 전파과정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밝혀진 결과로 보아, 가장 늦게 잡아도 중기 구석기시대인 7만∼12만년 전에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의 문화유산으로 생각되며 앞으로 좀 더 깊은 지층을 발굴한다면 전기 구석기시대 문화층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종 유적들은 화천댐 수문을 닫은 1989년 여름부터 다시 수몰되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이 물 속에 잠겨 다시 훼손되고 있는 현실이다. 봄철과 같은 갈수기에 파로호의 물이 줄어 수면이 낮아지는 시기를 이용해 발굴조사를 계속 실시한다면 파로호 유적의 전모가 밝혀질 가능성은 많다.

참고문헌

『상무룡리(上舞龍里)-파로호퇴수지역유적발굴조사보고서-』(강원대학교박물관, 1989)
「화천댐 파로호의 퇴수지역과 북한강유역 문화유적조사연구」(최복규, 『인문학연구』 27,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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